완벽에 매여 시작 조차 못하는 나 자신에게
학창 시절 공부를 유난히 싫어했다. 매번 새롭게 펴낸 교과서와 공책이 말썽이었다. 나는 필기에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고 수업시간, 선생님께서 칠판에 필기한 내용을 내 교과서에 깔끔하게 옮겨 적고 싶었다. 수업 내용에 집중해 꼬리가 올라가버린 내 필기에 수정테이프나 수정액을 범벅으로 칠했다. 이미 선생님께서 설명한 내용을 나를 스쳐 저만치 지나가고 있었다.
시험 기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시험 범위의 교과서 내용을 노트에 가지런히 옮겨 담고 싶었다. 예쁘고 빳빳한 노트 하나를 꺼내서 교과서 내용을 줄줄 옮겼다. 나의 신경은 옮겨적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노트 속 예쁘게 쓰여진 글자들이었다. 노트의 3분의 1을 채우고 나면 마음이 들지 않는 부분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간격을 못 맞춘 첫 문장부터 원래 생각했던 영역을 벗어난 문장 부호까지. 결국 노트를 찢고 쓰기를 반복하다 노트가 반토막이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포기한다. 그렇게 포기한 게 필기가 아니라 공부 그 자체였다.
완벽주의라 하면 모든 일을 완벽히 해내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대단한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런 완벽주의 성향이 나의 모든 도전을 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내가 조금이라도 미흡한 모습이 보이는 일에는 손사례를 치며 거절했다. 눈앞에 둔 길이 지름길인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익숙하고 긴 길을 돌아 돌아갔다.
회계 자격증 준비를 시작하면서 완벽주의 성향의 심각함이 크게 와 닿았다. 대학 때 전공했던 회계공부를 취업을 위해 다시 시작해서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결심했는데 문제를 틀리는 게 무서웠다. 명색의 전공과목인데 한 챕터의 문제 전체를 틀려버리고 나니 흥미와 의욕이 사라졌고 책을 펴는 것도 하기 싫었다. 결국엔 접수했던 시험까지 취소해 버렸다. 함께 자격증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는 준비해야 할 자격증이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나 혼자 떨어져서 허탈해할 내 모습이 무서웠던 것 같다. 여전히 틀리는 게 싫어 회계 문제집은 펼쳐진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
전 직장 주임 언니와 얼마 전 식사자리에서 이런 완벽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갉아먹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 완벽주의 때문에 회사를 퇴사했고 언니는 그 회사에 10개월을 버텼다. 나에게 전 회사는 새로운 업계로의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 직장이었고 직급 수직 상승의 기회가 되는 회사였다. 그런데 체계가 잡히지 않은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마디로 제 몫을 해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싫어 한 달도 근무하지 못하고 퇴사를 했다. 언니는 부당하게 업무가 부당하게 과중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모자라서, 부족해서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몫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10개월을 버텼다. 둘 다 자기가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결국 자기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둘 다 퇴사해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고 생각할수록 일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실수하지 말아야지 하면 서류에 오타가 생기고 숫자가 잘못 입력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경험을 사회 초년생이라면 다들 한 번쯤 겪어봤을 것이다. 그렇게 실수를 된통 하고 난 날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나 자신을 자책한다. 내가 이 일에 안 맞는 건가?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인가? 하지만 다음날의 나는 출근을 하고 결국 그 사고를 수습할 것이며 익숙해질 것이다. 이렇게 한 발짝만 물러나면 간단해진다. 틀려봐야 정답을 안다는 말이 이해는 되지만 왜 이렇게 와 닿지는 않는지 모를 일이다.
앞으로 하고싶은 일도, 해야할 일도 너무 많이 남아있는 나에게 이러한 완벽주의 성향은 징검다리 없는 시냇물과 같다. 너무 얕아서 시시할 정도의 시냇물. 내가 그 시냇물 앞에서 망설이는 사이, 다른 이들은 양말을 벗고 바지 끝단을 접어올려 한발씩 척척 나아갈 것이다. '바지야 갈아입으면 되지~' 정도의 마음가짐이 나에게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