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블루칼라의 감독이라 불리는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 대사다. 심장질환으로 일하지 못하는 다니엘(이하 댄)은 질병 수당을 신청했으나 제도의 허점으로 심사에서 탈락했다. 이에 항고하고 구직 수당을 신청했지만, 이 마저도 그에겐 녹록지 않았다. 결국 항고 재판 직전,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에 코가 시큰거리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댄은 자신이 복지 수당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여러 차례 증명해야 했다.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지만, 어쩐지 수치스럽고 자존심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영화에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은 건 댄에게서 몇 년 전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 I, Daniel Blake
고등학생 때까지 만해도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큰 부족함 없는 중산층 가정에 속했다. 그러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봄, 가세가 기울어 15년간 살던 아파트를 나와 작은 주택으로 이사해야 했다. 이삿날, 흐드러지게 핀 벚꽃 잎이 이삿짐 위로 흩날리는 모습을 멍하니 서서 봤다. 그 아름다운 봄 풍경이 내가 처한 현실과 무척 대조돼 눈물이 나려는 걸 아랫입술을 꽉 물고 참았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당면한 현실은 내게 다소 버거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 유방암 판정을 받아 몇 개월은 일하지 못하셨다. 연속되는 불행이 나를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짓눌렀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니, 내 대학 등록금이 문제가 됐다. 첫 등록금은 그간 여기저기서 받아 모아둔 용돈으로 해결했지만, 앞으로의 3년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그 당시 우리 대학엔 지도교수 추천 장학금 제도가 있었다. 담당 지도교수와 면담을 거친 후 장학금을 받는 제도다. 나는 그 장학금이 암흑 같은 내 미래의 탈출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고민 끝에 면담을 신청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도 교수실에 갔다. 나는 그간 대강당의 수많은 수강생 중 한 명으로, 먼발치서 조용히 수업만 듣던 학생이었다. 교수와 개인적인 대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생 첫 교수와의 대화는 내가 얼마나 그 ‘돈’을 원하는지, 가난한 사람 중 내가 그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거였다. 잔뜩 주눅이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 특별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자니,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져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면담 후 갖가지 소득증명, 재산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마침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경우 ‘돈을 받는 과정’은 댄보다 수월했지만, 그 과정에서 느낀 수치심과 자존심에 난 스크래치는 댄보다 심했다. 교내에서 그 교수님을 발견할 때면 그분이 눈치채기 전에 반대로 돌아가거나, 머쓱하게 인사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기 일쑤였다. 그래서인지 새삼 댄의 당당한 권리 요구가 대단해 보였고, 그 큰 목소리가 부러웠다. 복지 기관의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 날짜를 요구한다’를 스프레이로 갈겨 적었을 땐 통쾌함이 느껴졌다.
ⓒ I, Daniel Blake
누구나 행복한 삶(=복지)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반론의 여지가 있을까.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산 사람이 복지란 권리를 요구하는 건 당연시돼야 한다. 그러나 가끔 그 권리를 요구하는 과정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때가 있다. 댄과 내가 자신의 가난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에서 댄은 ‘코코넛과 상어 중에 사람을 더 많이 해치는 것은 코코넛’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무기나 범죄 같은 것들) 보다 안전하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이 인간에게 더 위협적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씁쓸하게 다가왔다.
나는 대학 3년 간 장학금을 받아 무사히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요즘 시대에 빚 없이 대학을 졸업하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고 있다.
부채를 갚는 마음으로 취업하자마자 모교에 소정의 기부금을 약정했다.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내가 꾸준히 기부할 수 있는 금액이다. 이 적은 금액이라도 가난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뻔뻔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면 그걸로 내 과거가 치유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