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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세윤 Aug 03. 2021

왜 죄송하다는 말을 안 해?

돈은 벌어야 되는 하루


출근길은 더운데 추웠다


-이번 역은 서울, 서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손과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검은색 면바지에 슥슥 닦았다. 등에 난 땀 때문에 오늘 입은 흰색 셔츠가 소나기라도 맞은 것처럼 군데군데 젖었다. 땀은 나는데 내가 더운 건지, 아니면 추운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땀이 나는 걸 보니 더운 것 같은데, 나는 춥다고 느꼈다.


승강장에서부터 계단을 전부 오르는 동안 몇 명과 어깨를 부딪쳤는지 모르겠다. 으레 그렇듯 부딪친 사람들은 서로 미안하단 말도 없이 각자 알아서 미묘한 불쾌감만 느끼고 말 뿐이다. 대학생 시절, 프랑스 친구가 서울의 지옥철을 처음 경험하고 혀를 내두른 것이 떠올랐다.  


"왜 다들 빠흐동(pardon)이라고 하지 않는 거야?"


서로가 무례하다는 자각도 없을 거라고, 단지 목적지만 향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뿐이라고. 내 미적지근한 해명 아닌 해명에 친구는 입을 삐쭉 내밀었었다.


밀물처럼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정신없이 걸어 마침내 회사 건물에 들어섰다.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가까스로 붙잡아 탔다.


"죄송합니다."


-22층, 등록


무미건조한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갔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가방에서 사원증을 꺼내 목에 걸었다. 오늘따라 사원증 목줄이 자꾸만 내 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나를 위로 올려주는데, 사원증은 나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반대로 작용하는 그 힘에 어쩔 줄 모르는 내 몸이 잠시 붕 떠 무중력 상태에 놓인 기분이었다.


-22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랫배에서 힘을 짜내 몸의 축을 만들고 힘 있게 걸으려 애썼다. 사무실 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문을 세게 밀었다.

 


옥상 말고 카페로 따라와


"안녕하세요."

“세윤 씨.”

“네, 차장님.”

“시청역에 있는 F호텔 알지?”

“아, 아뇨.”

“세윤 씨 모른다고 하니까 그럼 김 대리가 픽업 갔다 와.”


차장은 아침부터 영문도 모르는 말을 숨 쉬듯 내뱉고 담뱃값을 들어 자리를 떴다. 사수인 김 대리로부터 면박을 당할 게 분명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뛴 것인지 가슴을 옥죄어 오는 통증이 심하게 몰려왔다. 그때, 김 대리가 입을 뗐다.


“아휴, 모르면 좀 찾아봐. 찾아보고 답을 해야지. 이번에 오는 싱가포르 손님 픽업하려고 물어본 거잖아. 나도 지도 보고 가는 거야.”

“…”


아침부터 언성 높은 목소리에 불에 덴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열을 가라 앉히려고 찬 손등을 볼에 갖다 댔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꼭 그렇게 대답을 안 하더라.”

“네, 제가 지도 찾아보고 픽업 간다고 차장님께 말씀드릴게요.”


내가 F호텔을 모르는 게 순식간에 죄가 됐다. 아니, 그냥 처음부터 F호텔로 픽업 가라고 말했으면 좋았잖아. 모르는 걸 무조건 안다고, yes라고 답해야 하는 거야?


아침부터 맥이 빠졌다. 공허한 시선을 파티션 너머 통유리 창으로 옮겼다. 서울 시내 전경이 눈에 담겼다. 시원한 통창에 탁 트인 뷰, 저 멀리 남산타워도 보인다. 문득, 사무실 월세가 떠올랐다. 한 달에 3천만 원이었던가. 내 연봉보다 비쌌지 아마.


점심시간이 되자, 김 대리는 건물 1층 카페로 따라오라고 했다.  

순간, 옥상으로 따라오라는 권상우가 떠올랐다.

왼쪽 뒤통수가 저릿저릿, 쿡쿡 쑤셨다.



죄송하다고는 못 하겠고 돈은 벌고 싶습니다


“세윤 씨는 왜 죄송하다는 말을 안 해?”

“네...?”

“나도 이제 세윤 씨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하는 게 께름칙해. 세윤 씨가 알아서 잘 못하면 내가 욕먹어. 여기 직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가? 죄송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잘 없는데?”


그 무렵 나는 회사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진짜 죄송한 마음이 들지 않기도 하고, 그 말을 하는 순간 꾸역꾸역 쌓아 뒀던 내면의 둑이 무너져내려 수많은 감정이 현실로 범람할 것 같았다.


“제가 하도 대놓고 혼이 나니까 이제 노이로제가 생겨서요. 억울하기도 하고... 죄송하다는 말이 안 나와요.”


억지로 눌러 담았던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일순, 내가 내뱉은 말인가, 아님 뭐가 씐 건가 싶었다. 흠칫 놀랐지만, 이내 될 대로 돼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싸우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늘부로 퇴사하는 건가. 그럼 나도 이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육탄전으로 이어지면 내가 유리하겠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김 대리는 처음엔 조금 놀랐다가 곧이어 구겨지는 눈코입을 원래 자리에 잡아 붙들려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변화를 감지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즈음 나는 더 심해지면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들었고, 새치가 눈에 띄게 늘었으며, 휴가로 떠난 여행지에선 쓰러졌다. 다른 사람 감정 변화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한지 약 오 분 후.


김 대리는 정적을 깨고 어색한 연극 투로 힘들었겠네, 그동안 어떻게 계속 다녔어? 하고 쥐어 짜내듯 물었다.


나는 돈 벌어야 해서요, 여기 말고 다른 직장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하고 답했다.



그날로부터 4년이 흘렀고 나는 지금도 퇴사를 참으며 그 회사에 다닌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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