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세윤 Aug 14. 2021

직장 잔혹사

최 부장을 어떡하면 좋을까

“이야, 금 주임이 거기 앉아 있으니까 사무실이 환하다. 맨날 칙칙한 사내 새끼들만 보다가. 이 참에 아예 팀을 바꿔봐. 응?"

"아, 하하... 하."


더러운 새끼. 하루라도 성희롱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나. 아침부터 액땜했네.


컴퓨터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받고 영업 팀 장 과장 자리에 앉아 문제점을 찾고 있을 때였다. 사무실 안, 몇몇의 눈은 나에게 향했고, 몇몇은 그대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귀와 신경은 내쪽을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옆 부서 권 주임은 맞은편 자리의 이 대리에게 입 모양으로 농담하듯이 '성희롱, 성희롱' 하고 낄낄대며 웃어 보이는 것 같았다.


최 부장 말을 듣고 그냥 어색하게 웃어넘긴 내가 무척 싫어졌다. 왜 나는 아까 바로 반박하지 못했을까. 부장님, 그거 성희롱이거든요? 다음부턴 자제 좀 부탁드릴게요. 이 말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다른 여자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달랐을까. 예를 들면, 우리 팀 미친 홍 대리였다면? 할 말 다하고 못할 말 가리지 못하는 그 여자였다면 바로 반박할 수 있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홍 대리도 영업팀 남자들 수십 명 사이에 혼자 앉아 있었다면 쉽게 말 못 했을 거 같기도 하고.


주변 시선을 신경 쓰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한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블랙아웃된 모니터만 바라보다가 몇 분이 지났다.


"금 주임, 오래 걸릴까?"

"아, 잠시만요."


회의를 마친 장 과장이 내 대답에 책상에 놓인 담뱃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얼마 전 회식 자리가 생각났다.


"어, 금 주임은 이 쪽에 앉아."


장 과장이 가리킨, 비워진 한 자리는 최 부장 옆이었다. 여자 좋아하는 최 부장을 위해 부서원들은 늘 눈치껏 그의 옆 자리를 비워 뒀다가 여직원을 앉힌다. 우리 부서엔 여성이 단 두 명이다. 그중 한 명인 홍 대리는 이미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모르쇠로 일관한 채 썰어 나온 오이를 쌈장에 찍어 먹고 있었다.


‘눈도 안 마주치려고 애쓰네. 자기만 살겠다 이거지.’


최 부장 옆에서 한두 시간 그의 장단을 맞춰줘야 한단 생각에 눈앞이 아득했다. 왜 하필 퇴근할 때쯤 일이 몰려 제일 마지막으로 회식 자리에 온 건지 모든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이미 모두의 시선은 내게 향해 있었고 ‘거기 앉기 싫어요’ 하기엔 늦은 것 같았다. 다른 빈자리가 없기도 했고 왜 그 자리에 앉기 싫으냐고 누군가 물으면 사실대로 말할 자신도 없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어기적어기적 최 부장 옆으로 가 앉았다.


회식 장소는 장 과장이 냉동 삼겹살 맛집이라고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다. 여기저기 튀는 기름방울과 매캐한 연기 속에서 나는 최 부장과 몸이 닿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필 좌식 테이블로 이루어진 식당이라, 자칫하면 최 부장과 무릎이 닿기 일쑤였다. 내가 최 부장에게서 멀어지려고 할수록 그는 점점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꾸 이렇게 그와 무릎이 닿을 수가 있나.


그 와중에 최 부장은 내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요즘 내가 미드에 푹 빠졌는데 하우스 오브 카드라고 아느냐, 배우들이 다들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다, 미국 정치에 비하면 우리나라 정치는 애들 소꿉놀이 수준이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싹 다 물갈이를 해야 한다, 나라 돌아가는 꼴을 봐라.


딱히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최 부장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게 배설할 뿐. 나는 맥없이 하하… 하고 웃음인지, 바람 빠진 소리인지 나조차도 모르겠는 반응만 해주었다.


시끄러운 좌중에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자 최 부장은 아예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음식물이 가득한 그의 입 안이 그대로 보였고 그중 일부는 내게 튀었다. 아랑곳 않고 말과 음식 찌꺼기를 뱉어 내며 점점 더 가까워지는 최 부장 얼굴을 손으로 밀어버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최 부장이 불현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성희롱 예방교육’ 이야기를 꺼낸 건.


“야, 너네 중에 회사에서 성희롱하는 사람 있어? 장 과장, 네가 성희롱하냐?”

“야유, 부장님. 하하…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아,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저 딸도 둘이나 있잖아요.”

“그치? 그럼 누구야? 권 주임야? 이 대리야?”


갑자기 이름이 불린 권 주임은 억울하다는 듯이 삼겹살을 집은 젓가락을 황급히 내려 두고 두 손을 좌우로 저었다.


“저는 절대 아닙니다, 부장님.”

“아니, 우리 회사에서 누가 성희롱을 하길래, 성희롱 예방교육을 오프라인으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 강사랍시고 검증도 안 된 사람 회사에 불렀다가 내부 기밀 정보라도 유출되면 누가 책임질 거야? 응? 그리고 우리 회사에 성희롱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남자들을 전부다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냐고? 그냥 하던 대로 온라인으로 하면 되지. 솔직히 그 온라인 교육도 국가에서 하라고 하니까 하지, 굳이 할 필요도 없는데. 금 주임, 어떻게 생각해?”


최 부장이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물었다. 아까 미드 이야기를 할 때와 달리, 흐리멍덩했던 눈빛이 또렷하게 바뀌어 날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최 부장은 눈으로 ‘내 사회생활 짬바가 몇 년인데, 고작 주임이 나한테 까불어?’ 하는 듯했다.


“아, 저, 저는…”

“아, 부장님, 그게 꼭 우리 회사에서 누가 성희롱을 하니까 강사를 초빙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도 한 번 강사를 초빙해서 오프라인 교육을 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하고 제안하는 거였어요. 온라인 교육 계속 틀어 놓고 퀴즈 풀고 하는 거 귀찮지 않으세요? 강사 초빙하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데.”


내가 당황해서 우물쭈물하자, 홍 대리가 끼어들어 에둘러 해명했다. 이게 해명할 일인가 싶었지만, ‘목표는 진보적으로, 방식은 온건하게’라고 했던가. 강사를 초빙하려고 나름 온건 타당한 이유를 대는 홍 대리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최 부장은 최 부장대로 그런 홍 대리를 간파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간접적으로 라도 ‘회사 내 성희롱은 없다’는 홍 대리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직원들 앞에서 표현한 것으로 일단 만족한 것인지, 그의 미간 주름은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뼛속부터 영업사원인 장 과장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자자, 부장님, 그렇다고 하니까 기분 푸시고 제 잔 한잔 받으십쇼.”

“무슨 기분을 풀어, 내가 언제 기분 나빠했다고? 장 과장 말고 김 주임, 김 주임이 한잔 따라줘 봐.”


그건 분명한 시험이었다.


최 부장에게 향했던 시선이 다시금 내 쪽으로 몰렸다. 금 주임은 술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다들 팽팽한 긴장감 속에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싫어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 올랐지만, 이내 쓰게 삼켰다.


주저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빠르게 초록 술병을 들고 최 부장 잔에 따랐다. 박진감 넘치는 서사를 기대했던 수십 개의 시선들이 재미없다는 듯 제자리를 찾아갔고 식당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두 볼이 벌게진 최 부장은 만족한 표정으로 된장찌개를 퍽퍽 퍼먹었다.


이제 한계다 싶었다. 조용히 수저를 내려놨다. 최 부장을 외면한 채 공허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고기 불판의 열기에 식어 밍밍해진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여기 정말 맛없어.





*가끔 직접 하기 힘든 말은 소설로 씁니다. 


작가의 이전글 독립이 뭐가 좋아? 엄마랑 사는 게 편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