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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모솔새 Jul 28. 2021

편식하는 사람들의 점심시간

사실은 평범한 점심시간

나는 어느 날 시험 문제를 풀면서 출제위원에게 깊은 동지애를 느꼈다. 때는 2012년, 사무관을 선발하는 5급 공채시험 1차 시험장에서였다. 각기 다른 식성을 가진 5명이 피자를 골고루 나누어 먹는 방법을 묻는 문제였는다. 문제를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났던 것도 같다. 이건 분명히 열심히 편식을 해 왔던 사람이 낸 문제이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피자 토핑은 총 네 가지로, 새우, 버섯, 파인애플 그리고 소시지다. 해산물을 먹지 않는 사람과 소시지가 들어간 피자만 먹는 사람, 소시지가 있으면 안 먹지만 소시지와 새우가 함께일 땐 먹는 사람... 식성이 더 까다로운 인물도 제시되었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하고자 한다. 이 다양한 편식쟁이들이 모여 피자를 각각 2조각씩 먹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경우의 수가 한 가지가 아니라는 점은 더 대단하다. 


그래서 내가 이 문제를 맞혔냐고? 그렇다. 다행히 나는 십수 년간의 편식 경험을 통해 단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가리는 것이 많은 사람은 습관적으로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무엇을 먹지 못하는지 구분짓곤 한다. 편식을 하는 친구와 함께라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지지만 기본은 같다. 먹지 못하는 것은 걸러내고 먹을 수 있는 것만 선택지에서 남기면 된다. 그러니 사람이 5명으로 늘어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인터넷에서 작게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주는 대로 먹자'는 반응이 많았다. 내가 파인애플을 안 먹지만 않았어도 그 의견에 공감했을 텐데. 나에게는 새우를 못 먹는 친구도, 버섯을 못 먹는 친구도 있었으니 주는 대로 먹으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냥 안 먹으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은 잠시 들었다). 대신 '그래, 편식은 해도 피자는 2조각씩 먹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이 문제를 재평가하게 된 건 몇 년이 지나서였다. 직장인들은 매일 오전,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고뇌한다. 그 고민을 부서 막내가 전담하는 경우도 있는데 내가 그 막내였다. 아.


나는 그 때까지 나만한 편식쟁이는 없을 거라고 자부하며 살았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은, 세상에는 숨어 있는 편식자들이 많다는 거였다. 나만큼 잘 드러나는 편식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익힌 물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물에 빠진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은 흔했고, 돼지 내장을 안 먹는 사람은 더 흔했다. 두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자, 이제 문제 나갑니다. 어제 된장찌개를 먹었다고 할 때 오늘 점심으로 통일해서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추어탕 탈락, 돼지고기가 퐁당 빠진 김치찌개 및 돼지국밥 탈락. 소고기국밥도 마찬가지. 순두부도 탈락. 청국장? 어제 먹은 된장찌개와 별다를 바 없는데다 청국장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도 흔하다. 그러니 메뉴 통일은 꿈같은 일이고 메뉴가 두 가지로 나뉘기만 해도 다행이다.


번뇌의 점심시간이 거듭되면서, 옛날에 풀었던 시험문제가 떠올랐다. 그 까다로운 식성의 등장인물들과, 그럼에도 피자를 골고루 나눠먹어야 하는 극한의 상황은 단지 정답률을 조절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매일 점심 메뉴를 놓고 고뇌하는 누군가의 현실을 반영한 것일지도 몰랐다. 


오히려 현실이 문제보다 더 어려운 셈이다. 어제 먹은 메뉴 빼고, 상사가 싫어하는 메뉴 빼고, 상사가 좋아하는 것 중에서, 팀원들이 안 가리는 것 중에서... 주는 대로 먹을 수도, 굶을 수도 없는 우리들은 그저 오늘도 번민에 빠질 뿐이다.




해당 문제가 궁금하신 분들은 '5급 공채 피자 문제'를 검색해 보세요.

이미지 탭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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