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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모솔새 Sep 07. 2023

냉장고 독립 반대

어제저녁 식탁에는 고구마줄기를 넣은 고등어조림과 열무김치, 고추장물이 올랐다. 제철이 지나면 먹기 어려운 음식들이다. 여름 내내 장날마다 보드라운 열무를 사다가 김치를 담가 주신 어머님은 '찬바람이 들면 물김치가 맛이 없다'며, 부지런히 먹으라셨다. 촉촉하고 담백한 고등어에, 짭짜롬하게 간이 밴 고구마줄기를 얹어 흰 밥과 함께 한 숟갈. 그러고 시원한 열무김치와 매콤한 고추장물을 번갈아서 한 두 숟갈 뜨다 보니 금세 밥그릇이 바닥을 보였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은 다 양가 어머님들 덕택이다. 철마다 제철 음식이며 식재료를 날라 주시는 덕에 우리 집 냉장고는 마트에 자주 가지 않아도 늘 풍족하다. 쌀이 떨어지면 '쌀이 다 되어 간다'고 전화 한 통 드리고 받아 오면 된다.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우리 집의 쌀 소비량이 한 달에 얼마 정도인지, 몇 킬로짜리 포장을 사면 적당할지, 가격은 얼마쯤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저절로 채워지는 것은 쌀뿐만이 아니다. 부모님이 들렀다 가신 뒤, 정신 차리고 보면 못 보던 채소나 과일이 냉장고에 들어앉아 있다. 우리 집 냉장고는 언제나 부모님 댁 냉장고의 강력한 영향권 내에 있다.


대부분 대형마트 출신이 아닌 그 먹거리들은 이런저런 경로로 우리 집에 온다. 엄마가 사는 동네 이장님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가끔은 한 다리 더 건너 엄마의 단골 미용실 원장님을 거쳐서 온다. 그것들을 주시는 건 어머님의 초등학교 동기일 때도 있고 아버님의 골프 동료일 때도 있다. 품질도 품질이지만 아파트에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 부부로서는 얻기 힘든 것들이 많다.


봄이 오면 나는 쑥이며 두릅이 들어오기를 고대한다. 그러다가 영 인내심이 떨어지면 엄마에게 전화해서 올해 두릅은 아직이냐고 재촉하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엄마가 두릅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예전 살던 집처럼 마당에 두릅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가을이 되면 도토리를 주우러 다니는 사람들 속에는 어머님도 끼어 있다. 그 덕에 나는 결혼하고 도토리묵을 원 없이 먹게 되었다. 우리 어머님이 도토리묵을 기가 막히게 쑨다고 말한 적 있던가? 내가 도토리묵을 맛있게 먹는 바람에 어머님은 가을에 조금 더 바빠지셨다. 어제오늘 벌써 도토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며 아침 산책에서 열 알씩 주워 오셨단다.


문득 학교 앞에서 자취하던 대학생 시절을 떠올려 본다. 그때 나는 동네 마트에서 제일 적게 포장된 양파를 골라 껍질을 까서 썼다. 지금은 껍질을 까고 깨끗이 씻은 양파를 두 세알씩 받아다가 냉장고에 두고 쓴다. 가정을 이룬 지금보다 학생이던 그때가 더 독립적인 살림을 했던 셈이다. 


양가에서 받아온 반찬과 먹거리가 가득한 냉장고를 보면, 아이를 낳고도 아직 부모님의 무릎 아래에 있다는 걸 실감한다. 앞으로도 식탁에서 부모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우리 집 냉장고가 완전히 독립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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