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 이사를 할 걸 그랬어
10년 넘게 혼자 살았지만 가구는 별로 없었고, 그건 H도 마찬가지였기에 차만 불러서 이사를 하기로 했다. 8년 동안 이사를 안 했고, 매일 같이 온라인 쇼핑몰을 드나들었으며, CD는 더 이상 안 샀지만 바이닐을 사기 시작했고, 같은 날 두 집의 짐을 모두 옮긴다는 현실을 외면했던 거다.
짐 싸기의 시작은 옷부터. 곤도 마리에가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 했지만, 대충 다 설레는 데다가, 설레지 않는 건 현장에서 일할 때 필요한 편하고 어두운 색 옷인 걸. 겨울 코트도 다 못 넣었는데 박스 하나가 다 찼다. 생각보다 박스가 작은 게 아니라 생각보다 옷이 많은 거였다. 그리고 이걸 들고 3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갈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한 때 좋아했지만 최근 1년 간 안 입은 옷과 신발, 그리고 '에코백이니까'하고 하나둘 사다 보니 수십 개가 된 천가방 대부분과는 이별했다. 바이닐은 무거운 데다 에어캡으로 싸는 게 일이었다. 내 휴대전화에는 마포구 대형 폐기물 배출 신청 탭이 매일 열려있었다. 주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필요한 걸 가져가게 했다.
3주 동안 버릴 짐을 분류하고 가져갈 짐을 싸면서 스스로를 원망했다. '도대체 그동안 뭘 이렇게 산 거야?'
내가 고난의 짐 싸기 과정을 거치는 동안 H는 "나는 짐 별로 없어서 금방 쌀 거야."라고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H의 원룸은 두 사람이 앉아서 밥 먹을 공간만 빼고, 나머지 바닥엔 뭐든 쌓여있었다. 옷과 신발과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과 잡지 더미와 작은 가구는 버리고, 책은 둘이 백팩에 절로 뒤로 넘어갈 만큼 가득 넣고 가서 중고 서점에 팔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CD와 피규어도 정리하고... 가만히 있어도 닭똥 같은 땀방울이 흐르는 여름에 이게 뭔 고생인가 싶었다.
이사 전날 밤, 테이블을 이미 내다 버려서 짐 박스를 테이블 삼아 배달 음식을 먹는데 어쩐지 자꾸 웃음이 나왔다. ‘10평도 안 되는 곳에 뭘 이렇게 많이 쌓아놓고 살았을까?'라며 인생을 반성하는 게 끝난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지, ‘미니멀리스트가 돼보자’고 지킬 리 없는 다짐을 하는 서로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소비를 정리하고 함께하는 새로운 소비를 위한 리셋 버튼을 누른 참이었고,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