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월 Jun 29. 2019

즐겁지 않을 수도 있는 쇼핑

결혼이요?? 결혼 안 하는데요?

이사란 과거를 정리(짐 싸기)하면서 미래를 계획(새 집 물건 쇼핑)하는 일이었다. 시작은 집 사이즈를 재는 것부터. 4인 가족이 살고 있던 그 집에는 어머니와 초등학생 아들이 있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아주머니께서 물었다.

"그래서 두 분 결혼은 언제 해요?"

"결혼이요?? 결혼 안 하는데요?”

좀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방과 베란다 사이즈를 재면서 남들이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새삼 깨달았지만, 우리는 결혼 예정이 없는 애인이자 하우스메이트가 될 사이다.


벽에 붙여놓았던 포스터를 떼서 뒷면에 도면을 그리고, 배치를 정했다. 각자 집에서 가져올 것과 사야 할 것 목록도 작성했다. 무인양품 카탈로그에 나올 것 같은 단정한 나무 느낌을 머릿속에 그렸으나, 금방 가격이라는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결과적으로 바뀐 것들도 많지만, 기본 도면과 목록이 있어 다행이었다.

H는 이번 기회에 양문형 냉장고를 무척 갖고 싶어 했지만, 가격에 한 번 놀라고 물리적으로 높이 5cm의 벽에 부딪혀 일반 냉장고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본 멋진 집 사진들을 떠올리며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소파와 티테이블도 있는 거실을 꿈꿨으나 거실 크기 상 불가능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고민에 한참을 휩싸여있다 "거실에 누워서 TV 못 봐도 괜찮아?"라는 말에 정신이 번뜩 들어 좌식 생활을 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코타츠를 사자! 무인양품의 코타츠를 탐냈지만 가격과 전압과 배송 등의 압박이 있었다. 큼직한 사이즈로 국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했다. (훗날 이 코타츠는 겨울 동안 우리 집 최고의 자랑이 된다. 평소에는 식탁으로 손님맞이 공간으로 작업 공간으로 독서 공간으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편안하고 디자인도 깔끔한 좌식 소파를 찾아 헤매고 싶었으나, 이건 선택의 폭이 그냥 좁았다.


원목 장식장과 그릇장과 화장대와 책장도 갖고 싶었지만, 마음에 드는 건 하나같이 우리의 예산을 넘어섰다. 결국 목적지는 이케아였고, 여기에서 많은 것들이 결론이 나는 동시에 가능한 원목 느낌을 원했던 이미지도 깨졌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엔 블랙과 그레이와 톤 다운된 민트도 있다.)

많은 결론을 내린 이케아에서

'쇼핑 = 행복'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는데, 분명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큰돈을 쓰는 쇼핑인데,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보자마자 "이거 마음에 들어!"하고 크게 망설이지 않은 게 수건 정도라서 일까. 대부분의 구매는 다음의 과정을 거쳤다.

"이거 가격도 그렇고 사이즈도 그렇고 괜찮은 거 같은데 어때?"

(장단점을 따져보고 비슷한 상품을 비교해보고 최선의 선택인지 생각해 본다.)

"그래, 그럼 이거 사자."

쇼핑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돈에 맞는 괜찮은 물건을 골라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는 것 같았다.


만약 이사 갈 집이 우리 소유였다면, 아주머니가 물어본 것처럼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영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결혼을 하는 거였다면 좀 달랐을까?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2년 후에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할지도 몰라', '혹시라도 각자의 길을 가게 됐을 때, 이 물건들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와 같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좀 더 쉽게 타협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이런 불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사라진 건 아닐 거다. 확실한 건 이런 불안을 들춰볼 정신이 없는 삶이 시작됐다는 것. 가뜩이나 좁아서 정수기도 포기한 주방에 "커피 매일 사 마시는데, 돈 아낄 수 있잖아!"라며 드롱기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이렇게 풀 네임으로 말하면 좀 더 멋있게 느껴지는 물건이다)을 꾸역꾸역 들여놓았다. 커피 머신이 생기니 원두를 사야 했고, 텀블러도 사야 했다. (소비의 굴레는 끝이 없다!) 절약은 전혀 안 된 것 같지만, 밖에 나가지 않고도 편하게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 조금은 멋있는 집에 살게 된 것 같다. 타협을 거쳐 구매한 저렴한 책장엔 ‘정말 사도 될까?’라는 과정 없이 구매한 몇십 권짜리 만화와 책들이 자리를 찾아가고, 바이닐도 본인의 공간을 넓혀줄 것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그뿐인가, 벌써부터 '다음에 이사 가면 이거 사자'는 말을 스스럼없이 둘 다 내뱉고 있다. 


결국 인생 최대의 소비를 하면서도 한눈에 ‘이거다!’ 싶은 걸 망설임 없이 구매하는 멋진 경험은 못했지만, 머릿속에 그렸던 단정한 집은 아니지만, 천천히 각자와 공동의 취향이 깃든 물건으로 채워나가는 중이다. 이사를 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또다시 인생을 반성하며 짐 정리를 하겠지만.

이전 02화 우린 그동안 뭘 이렇게 산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