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하는 것에 익숙해지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했다. 동거인 항목이 생긴 게 낯설었지만, 같이 사는 게 맞으니까 이상할 건 없다. 어쨌든 망원 동민이 되기 위한 절차는 모두 끝났다. '발리 인 망원'에서 밥을 먹으며 "근데 아직도 여기 놀러온 기분이야."라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상수, 합정에 살던 친구들이 하나둘 각자의 이유로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서, 지겨워서, 월세가 비싸서... 나 역시 여러 이유를 말할 수 있지만, H와 함께 제일 많이 이야기했던 건 “이 동네에서 밥 먹는 게 지겨워.”였다. 상수, 합정을 떠난 친구들 대다수의 목적지도 망원동이었다. 그동안의 생활권에서 크게 멀지 않으면서 (아직까지는) 좀 더 조용하고, (아직까지는) 조금 더 싸고, 좋아할 만한 가게들이 많으면서도 사람 사는 동네 같은 느낌 때문이었을 거다.
망원역 가는 길은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귀갓길 버스 정류장은 아직 헷갈리고 있던 때였다. 건물 계단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고, (지난 십여 년 동안의 원룸, 오피스텔 생활에서는 외국인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할 때 빼고는 없었던 일이라) 당황한 나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며칠 지내다 보니 이 건물에서 인사는 당연한 것이며, "얼마 전에 3층으로 이사 오셨죠?"라며 우리의 존재까지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떡이라도 돌렸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이삿날 전에 사시던 가족분들이 주인집에 올라가 인사하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난 그동안 이사 나가는 날 보증금 관련 문자만 주고받아봤는데!
인사는 마을버스에서도 계속됐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버스에 오르며 기사님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어서 와요.”라고 같이 인사해주시는 기사님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게 뭐 별 건가 싶지만, 그 별 거 아닌 게 그렇게 좋다. 망원동을 지나는 7011에서는 잘 없는 일이 마을버스 9번과 16번에서는 일상이다.
버스정류장을 확실하게 알게 될 때쯤 인사를 하는 것도 익숙해졌고, 사실 이미 동네도 좋아하게 됐다.
낮은 건물이 많아 창밖 풍경이 펼쳐져 보이고, 목적 없는 산책길에도 작은 가게를 새로 알게 되고, 곳곳에 고양이를 위한 밥그릇이 놓여있고, 망원유수지에 가면 예쁜 하늘을 탁 트인 풍경으로 볼 수 있다.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망원시장에서 장을 보거나 간식을 사 먹는 것도 이 동네에 와서 찾은 즐거움 중 하나다. (화창한 날 쥬씨 수박주스와 시장 고로케와 찹쌀도넛을 먹으며 걸으면 세상을 가진 기분이다.)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책 대여점도 여긴 남아있다. (겨울엔 시장에서 귤 한 봉지를 사고 만화책을 한아름 빌려 돌아와 코타츠 앞에 앉으면, 이 세상이 내 것이다.)
어떻게 좋은 점만 있겠는가. 빌라나 주택이 없어지더니 상가 건물이 들어서고, 쓰레기 배출을 제대로 안 하는 게 자주 보이고,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벌레도 많다고 하고(세스코 점검과 함께 집 안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막았다), 주말이면 인기 많은 가게들 앞 보행로가 막히기도 하고(제발 예약제로 바꿨으면). 좋은 점만큼 싫은 점도 금방 말할 수 있지만, 원래 장점이 크면 단점을 커버하는 거다.
편의점에 가는 내 옷차림이 신경 쓰일 만큼 잔뜩 멋을 낸 사람들 사이를 고개 숙인 채 지나가야 했다. 어쩌다 나보다 높은 층에 사는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날엔 내려서 문이 닫힐 때까지 복도 끝까지 갔다가 방문 앞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동안 막차가 끊기기 전에 돌아갈 사람들로 가득 찬 곳에서 살았던 나는 그랬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편의점에서, 빵집에서, 카페에서, 미용실에서 "이 동네 사시죠?"라는 질문을 듣고 "네, OOO 쪽에 살아요.”라고 대답할 때처럼, 이 동네 사람이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 조금은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