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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Jul 14. 2019

다른 사람과 살고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일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 살던 집 곳곳엔 견출지가 붙어있었다. 서랍처럼 생겼다 싶은 곳엔 어김없이 '문구', '넓은 접시', '반질 고리'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분류된 이름들이 한구석에 엄마 글씨로 적혀있었다. 그릇이든 가위든 손톱깎이든 사용한 후엔 제자리에 넣는 게 당연했다.


오 남매, 육 남매인 집에서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만이 경제 활동을 해 넉넉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엄마 아빠는 절약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내가 크리넥스를 팍팍 두장 뽑아서 쓰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어렸을 땐 가구의 미관을 해치는 그 견출지가 싫었고, 크리넥스 한 장 마음대로 못 쓰는 게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년을 그런 환경에서 살았기에 '물건을 놓아두는 위치를 정하고 쓰고 난 후엔 제자리에 돌려둔다', '무엇이든 필요한 만큼만 사는 것이고 쓰는 것이다' 같은 문장들이 내 마음속에도 자리 잡아버렸다.


지금의 내 삶의 방식 일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모든 물건은 놓아둘 곳을 정하고 사용 후엔 가급적 바로 제자리에 돌려둔다.

- 물건이든 전기든 물이든 낭비하지 않는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아낄 수 있는 건 아낀다.


H 삶의 방식 일부를 정리하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다.

- 언젠간 놓아둘 곳을 정할 거니까 일단 대충 가까운 데 둔다. 지금 쓴 물건은 곧 다시 쓸 수도 있으니까 이따가 제자리에 돌려둘 거다.

- 물건이든 전기든 물이든 낭비하지는 않지만, 편한 만큼 쓰는 건 낭비가 아니다.


우리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르게 살아온 게 분명하다. 빨래가 말랐다 싶으면 개서 제자리에 넣어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와는 달리, H는 건조대에서 그대로 두고 필요할 때마다 입는 걸 선호한다. (건조대에서 모든 것이 사라질 때쯤이면 새로 빨래를 해야 하는 시간이 돌아오므로.) H는 키친타월은 물기를 충분히 닦을 수 있는 만큼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 엄마가 크리넥스를 쓰는 나를 보며 그랬듯) 키친타월을 여러 장 뽑는 H를 볼 때마다 내 눈이 동그래진다. 손이 작아서 딱 맞는 고무장갑을 찾기 어려웠던 나는 맨손으로 설거지를 해왔기에 너무 뜨거운 물은 별로지만, H는 아주 뜨거운 물로 설거지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밥을 다 먹으면 바로 일어나 내 밥그릇부터 치우는 게 버릇이 된 나와는 다르게 H는 식사의 여운을 즐긴 후 한 번에 치우는 걸 선호한다.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각각 10년 넘게 혼자 살아온 우리가 서로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내 방식이 꼭 최고가 아니니까 우기면 안 된다. 머리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간다. "물 지금 안 쓰면 꺼야지!" - "바로 쓸 건데 귀찮게 왜 꺼?" 같은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엔 에어컨 작동 방법(시원해졌으면 온도를 올리면 되지 vs 제습으로 돌리면 되지) 때문에 방문 쾅 닫고 들어갈 정도로 크게 싸웠다.  


혼자 살 땐 다른 의견을 마주할 일이 없었다. 밖에서는 다른 사람 의견도 듣고 내 생각을 바꿀 때도 있지만, 집에서 만큼은 내가 절대적이었다. 그 절대성이 위협받을 거라는 걸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자신이 절대적인 세계의 벽을 조금씩 무너트리는 중이다. 처음엔 싸움이 될까 봐 눈치 보며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 전해지는 마음 같은 건 없다. 'H가 여기서 뭘 했구나'를 내 눈으로 보지 않았어도 흔적이 말해준다. 그 흔적을 말없이 주섬주섬 치운다. 이미 물기까지 마른 그릇을 H가 말없이 다시 뜨거운 물로 설거지한다. 이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돌려두는 건 언젠가 터질 폭탄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일 뿐이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자꾸만 날이 선다. 남이 보면 진짜 별 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나서야 조금씩 바뀌는 게 생겼다. 요즘엔 "으 또 잔소리!" 하면서도 행동은 상대방이 말한 대로 할 때도 있다. 가끔은 상대방의 말대로 했다고 자랑도 한다. "나 플라스틱 통 물에 헹궈서 재활용 통에 넣었어!"


빨래가 마르고 하루 이틀 건조대에 더 있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개서 넣는다. (물론 "빨래 개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다.) H가 키친타월 쓰는 건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스몰 사이즈 고무장갑을 사서 설거지는 뜨거운 물로 한다. 밥을 먹은 후엔 잠시 그릇을 그대로 뒀다가 둘이 눈이 마주치면 "으쌰!" 소리를 내며 일어나 치운다. (사실 H가 먼저 "이제 치우자"라고 말할 때가 더 많아졌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배우는 일엔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진 않게 됐다. 말을 하면서 조금씩 바뀌는 것도 생겼고, 결국 각자가 원하는 대로 하면서도 말을 내뱉는 걸로 그 스트레스를 풀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혼자 살 때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큰 장점은 작은 단점을 커버한다.) 둘이었기에 좀 더 큰 집에서 쾌적하게 살게 됐다. 혼자라면 망설였을 책이나 음반도 비용을 분담하니 좀 더 쉽게 살 수 있게 됐다. 나는 넷플릭스를 H는 왓챠를 구독하고 있어서 둘 다 볼 수 있게 됐다. 각자가 좋아하는 게 한 곳에 모이니 좋아하는 게 더 많아졌다. 혼자 살 때는 상상도 못 했던 감자탕, 닭볶음탕, 월남쌈, 로스트 치킨, 탕수육, 가라아게 같은 걸 집에서 (H가) 만들어 (같이) 먹는다.


"누군가랑 같이 사는 건 상상도 안 돼서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오랜 시간 말해왔지만, 각자의 일을 하다가도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 또 각자의 책을 읽다 잠드는 일상이 편안하다. 집에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오늘 내 하루가 어땠는지를 물어봐준다. ‘거절당하지 않을까? 선약이 있지 않을까?’라는 걱정 없이 그게 뭐든 함께 하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게 이렇게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주는 일인지 예전의 나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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