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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Aug 11. 2019

우리 집 식물의 여름 나기

함께 사는데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건 식물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적절히 쏟아져서 그런지 엄마 아빠 집 베란다에 있는 식물은 다들 쑥쑥 참 잘 자란다. 집엔 나무와 꽃이 항상 가득했다. 따뜻한 계절이 되면 성실하게 꽃이 피거나 잎이 무성해지거나 열매가 열렸고, 정원의 장미를 꺾어 풍성한 꽃다발을 만들어 학교에 가져갔다. 식물을 좋아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선물 받은 선인장을 ‘아, 물 줘야 하나’ 생각했을 때 이미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로 마주한 이후로 내가 사는 집엔 식물을 들이지 않았다.

 

지난해 봄 H에게 화분을 선물 받았다. “이름 들었는데 까먹었다.”라는 말과 함께 내민 회색 화분엔 진한 초록빛이 가득했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두고 물도 자주 줬다. 물이 흙을 타고 내려가며 나는 작은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한참 뒤에 알게 된 식물의 이름은 크루시아였고, 직사광선에 약하며 건조함에 강한 아이였다. 바보 같은 사람을 만나 햇빛도 쨍쨍 받고 물도 많이 먹었으나 다행히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


예전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H와 '식물 저승사자'를 읽고 조금 관심이 생긴 내가 더해져 식물 식구는 늘어났다. 뱅갈 고무나무, 인도 고무나무, 콤팩타, 용신목, 유접곡, 엑설런트 포인트, 유칼립투스, 올리브나무, 팔손이나무, 후마타 고사리, 로즈마리... 집에 데려오는 식물은 둘이 상의해서 정하지만, 식물을 더 자주 들여다보는 내가 자연스레 물 주기 담당이 됐다. 식물이 좋다는 마음만 있었지 아는 것이 없었기에 처음엔 식물 살 때 들었던 대략의 가이드(2~3일에 한 번, 1주일에 한 번)를 바탕으로 물을 흠뻑 주기도 하고, 어쩐지 생각날 땐 조금씩 물을 주기도 했다. (다행히 이런 내 모습을 목격한 H가 "그렇게 물 주면 죽을 수도 있어!"하고 말려주었다.) 조금씩 책과 온라인 검색으로 공부를 했다. 몇 달 후, 나는 햇빛과 물을 좋아하는지를 확인한 후 집 안과 베란다 곳곳에 식물 각각의 자리를 정했고, 나무젓가락으로 흙을 찔러봐서 상태를 확인한 후 욕실에서 샤워기로 물을 주게 됐다.


이들과 함께 처음 맞는 여름, 이별이 찾아왔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집을 비운 사이 로즈마리가 조금 말랐나 싶더니 금세 떠났고, 비교적 키우기 쉽다던 콤팩타는 머리가 차례로 꺾여나갔고, 엑설런트 포인트도 한순간 푸르름을 잃었다. 말라가는 식물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마른 식물은 물을 주고, 통풍 잘 되라고 가지치기도 해주고, 바람 드는 곳에 내놓고, 과습이 의심돼서 흙도 갈아주고, 벌레가 생겼나 싶어 살충제도 희석해서 줬는데. 이미 생명력을 잃은 식물에겐 별 소용이 없었다.


한동안은 물속을 걷는 것처럼 습하고 또 습하더니 이젠 밤이 돼도 30도를 기록할 정도로 뜨거운 날씨가 이어진다. 창문을 열 때마다 후끈한 열기에 놀라고, 나가서 조금 걷기라도 하면 모든 땀샘이 열린 것처럼 땀범벅이 돼버린다. 내가 하루에 몇 번이고 샤워를 하고, 에어컨 앞에서 시원한 바람도 쐬는 동안, 작은 화분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식물들은 답답했을 거다. 목말라죽겠다고, 뜨거워 죽겠다고, 습하고 답답하다고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을 텐데. 몇몇 식물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걸 알게 됐다.


옆 건물 때문에 직사광선이 쨍쨍 들지는 않는 베란다에 식물을 모아놓고 서큘레이터를 돌려주기 시작했다. 거실과 통하는 문은 열어서 습도 관리는 에어컨이 책임지게 한다. 기온이 좀 떨어지고 습도가 높지 않은 밤에는 베란다 창문을 열어 공기가 통하게 해 준다. 비 예보가 있거나 습한 날엔 흙이 말랐어도 물 주기를 늦춘다. 물은 해가 완전히 진 밤에 욕실로 데려가 샤워기로 시원하게 주고 화분 밑으로 물이 다 빠질 때까지 한참 둔다. 베란다를 향해 서큘레이터가 돌아가고 있는 걸 본 친구는 "쟤네들이 상팔자네."라며 웃었다.


더 이상 식물 저승사자가 될 순 없으니 노력하는 수밖에. 함께 사는데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건 식물도 마찬가지였다. 

 

서큘레이터 바람을 맞기 위해 모인 식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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