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월 Sep 26. 2019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보리차

귀찮음과 싸우면서, 오늘도 보리차를 끓인다

혼자 살았다면 부엌이 얼만한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을 거다. H가 원하던 양문형은 아니지만 큼지막한 냉장고 옆에는 싱크대가 있다. 한 칸짜리 개수대와 그만큼의 조리대 그리고 냄비 4개가 한 번에 올라갈 리 없는데 어쩐지 4 구인 가스레인지. 맞은편엔 싱크대 전체 너비와 맞먹는, 이케아에서 거실 수납으로 추천 중이던, 흰색 선반을 설치했다. 커피 값 아낀다며 산 에스프레소 머신(절약이 됐는진 모르겠다)과 빵 굽겠다고 구입한 미니 오븐(빵은 사 먹는 거다)과 전자레인지, 전기 포트 그리고 큰 접시들과 라면, 과자, 김 등이 담긴 바구니가 선반을 빼곡하게 채운다. 한쪽 구석엔 뚜껑이 있는 단정한 흰색 쓰레기통 두 개가 놓여있고, 냉장고와 거대 선반 옆에는 바퀴가 달린 날렵한 선반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날렵한 선반엔 생수병과 요리 재료가 산을 이룬다.


혼자 살았다면 요리를 안 했을 테니까 싱크대 조리대 위에 설거지 건조대만 두면 끝이었을 텐데.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H 덕분에 우리 집 부엌엔 여유 공간이 없다. 조리 공간을 조금이나마 확보하려고 설거지 건조대 대신 개수대 위에 선반을 설치했다. 부엌 위시리스트에 있던 얼음 정수기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보리차를 끓이는 건 이런 현실에 순응하는 것인 동시에 최소한의 양심이다. 둘 다 혼자 살 때 그랬듯 마트에서 2리터 생수를 시켰다. 냉장고 옆 날렵한 선반은 생수병으로 묵직해졌다. 단정한 모습의 재활용 쓰레기통은 제모습을 잃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생수병이 비워지면서 재활용 쓰레기통 뚜껑을 닫을 수 있는 건 쓰레기를 내다 놓은 날 저녁뿐이었다. 화목일, 쓰레기를 배출하는 그런 날 중의 하루였다. 생수병이 가득한 봉투를 집 앞에 내려놓고 올라와 H를 향해 외쳤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재활용품으로 분리되긴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어떻게 재활용되는지는 전혀 모른다. 우리가 매일 만들어내는 페트병이 다시 세상에 필요한 무언가가 되는지 아닌지 확신이 없다. 그래서 (정확히 뭐가 아닌지 몰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 정수기 놓을 자리도 없는데.” 대책도 없이 우기기 좋아하는 버전의 내가 또 등장했다는 듯 H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브리타가 잠깐 떠올랐지만, 올려둘 곳이 마땅찮아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H의 얼굴이 밝아진다. “우리 보리차 좋아하잖아. 보리차 끓여먹자! 그래도 생수도 사긴 사야 해. 얼음 얼릴 때랑 요리할 땐 써야지.”


밖에 나갔는데 아무것도 안 사서 들어오면 어쩐지 풀이 죽는, 쇼핑을 좋아하는 우리는 신이 났다. 마트에 가서 4리터짜리 주전자와 30개들이 보리차 한 팩을 사고,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의 2리터짜리 냉수 전용 물통도 2개 샀다. 그날부터 우리는 보리차를 끓여 마시기 시작했다.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워 팔팔 끓이고 보리차 2개를 넣은 후 30분 후에 빼준다. 하룻밤 정도 물이 식도록 둔 후, 물통에 채우고 냉장고에 넣으면 끝이다. 가끔 보다는 자주, 보리차 빼는 걸 까먹어서 아주 진한 보리차를 마신다. 이틀에 한 번은 물 끓이는 날이 돌아온다. 집안일 관련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설거지해야지, 빨래해야지, 청소기 돌려야지’가 아닌 ‘보리차 끓여야지’가 됐다. 금방 보리차 맛에 길들여진 우리는 이제 밍밍하게 느껴지는 생수를 먹어야 하는 상황이 올까 전전긍긍한다. 여행 가기 전날에도 돌아왔을 때를 걱정해 짐을 싸다가도 벌떡 일어나 보리차를 끓인다. 귀찮음에 금방 패배할 줄 알았는데, 머지않아 보리차 끓이기 경력 1년 차가 된다. 물을 끓이고 보리차를 넣었다 빼고 식혀서 냉장고에 넣는 정해진 과정을 수행하면 우리에게 이틀 동안 마실 물이 생긴다는 든든한 기분이 귀찮음보다 좀 더 힘이 세다.


2리터 생수병 12개가 소진되는 데는 걸리는 시간은 두 달이 됐고, 재활용 쓰레기통은 뚜껑이 닫힌 본래 모습을 찾았다. 보리차는 우리에게 ‘집’을 의미하는 상징이 됐다.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찢어질 것 같은 겨울에는 ‘코타츠에 앉아서 보리차 마시고 싶다’, 얼굴에서 파운데이션이며 선크림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여름에는 ‘얼음 보리차 마시고 싶다’가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대체한다. 집에 돌아오면 부엌으로 달려가 보리차와 유리컵부터 챙겨 소파에 앉는다. 여전히 재활용 과정은 전혀 모르고, 배달시킬 때 젓가락 주지 마세요 하는 걸 잊을 때도 많고, 시장 갈 때 장바구니를 깜빡할 때도 많지만, 최소한 매일 빈 페트병을 만들어내지는 말자는 작은 양심은 보리차와 함께 지켜가고 있다.  


이전 07화 우리 집 식물의 여름 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