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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Aug 05. 2019

집 밥을 그리워한 적은 없지만

그건 남의 엄마의 손 맛이거나 상품의 맛이었다

다른 지방에서 근무하며 주말에만 집에 오던 간호 장교였던 엄마는 결국 일을 그만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라 엄마가 소령이라는 계급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건 가끔 놀러 오는 엄마 학교 동기, 후배 이모들과 빛바랜 사진을 통해서였다. 내가 열 살 때쯤이었나, 시내 병원에 가서 면접을 보고 온 엄마가 "거기 수간호사가 얼마나 얄밉게 굴던지..." 하면서 화를 냈던 건. 병원이 있는 시내에 가려면 30분을 걸어 40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타야하는 시골이라, 동네 어르신들이 주사를 놓아달라고 오는 걸 종종 볼 순 있었지만, 엄마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경력 단절’이라는 말을 알게 된 건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토요일엔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외화 드라마를 봤다. TV 앞에 앉으면 엄마가 떡볶이나 도넛 같은 간식을 내줬다. 바로 한 따뜻한 음식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식탁에 올라온 김치나 반찬이 맛있어서 “이거 진짜 맛있어!”라고 말하면, 엄마는 잠깐의 정적 끝에 "그거 OO네 엄마가 준 거야."라고 했다. 나와 오빠가 맛있다며 젓가락을 다투는 음식 대부분은 다른 집에서 받았거나 소시지나 햄처럼 산 음식이었고 우리의 입은 엄마가 말하기 전에 그걸 귀신 같이 알아챘다. 캐나다에서 지낼 때도, 지독한 냄새가 난다며 배달원이 도망치듯 던져놓고 간 상자에 들어있던 건 엄마가 마트에서 산 포장 김치였다. 캐나다에서 돌아와서 제일 먼저 먹고 싶었던 건 학교 앞 HOT 떡볶이였지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가 아니었다. 내가 맛있게 먹었던 건 남의 엄마의 손 맛이거나 상품의 맛이었다.


혼자 살게 된 이후로 엄마는 꾸준히 택배를 보냈다. 평소에 집에 가도 엄마가 “한 번 먹어봐.”라고 하기 전까지 절대 손대지 않는 멸치볶음 같은 밑반찬과 자취생의 냉장고 크기는 고려하지 않는 양의 김장 김치 같은 것들이다. 집에서 먹는 밥이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밥솥은 있지만 한 달에 한 번 켤까 말까 했다. 결국 상자에 담겨 온 엄마의 음식들은 몇 주 또는 몇 달의 시간이 걸려 처리하기 힘든 쓰레기가 되곤 했고, 그럴 때마다 분통이 터졌다.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차곡차곡 담는 과정도 싫었지만, 엄마가 애써 보내준 걸 버리며 느끼는 죄책감 때문이다. "집에서 밥 안 먹어. 밖에서 다 사 먹으니까 제발 보내지 마. 이번에 보내준 김치는 1년이 지나도  다 못 먹어." 10년이 넘게 말한 덕분에 이제는 "쌀 있어? 고구마 캤는데 보내줄까? 땅콩 보낼 테니 볶아 먹어." 같은 예고와 함께 식재료 상자를 받는 확률이 높아졌다. (물론 가끔은 아예 예고가 없고, 또 예고엔 없던 멸치볶음이 들어있는 반찬통도 같이 온다.)


엄마가 보내준 상자 안에 있는 감자, 양파, 마늘, 고구마, 땅콩 같은 식재료를 그나마 반기게 된 건 함께 살고 있는 H 덕분이다. H는 입이 심심한 밤이면 약한 불에 시간을 들여 땅콩을 볶고, 비가 오는 날엔 뚝딱뚝딱 감자전을 만들고, 에어프라이어에 돌린 고구마가 지겨워질 때쯤엔 고구마스틱을 만든다. 요리할 시간이 충분한 주말엔 망원 시장에서 저렴하게 산 등뼈와 감자와 양파를 듬뿍 넣은 감자탕을 끓이고, 내가 좋아하는 매콤한 닭볶음탕도 만든다. 이젠 택배가 도착하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신문지로 싸서 햇빛이 덜 드는 베란다에 넣거나, 냉장고를 정리해 한 구석에 자리를 만드는 게 내 일이다. “우리 엄마가 만든 김치찌개 먹고 싶다.”는 말은 여전히 거짓말이지만, 엄마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키워낸 것들은 지금 나의 식구인 H의 손을 거쳐 맛있는 한 끼가 된다. 뒤늦게나마 나는 엄마의 손 맛은 아니지만 집 밥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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