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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May 31. 2021

타인의 행복한 추억이 나도 행복하게 만든다.

한달살기 사장님이 되어 좋은 점

 두 달 만에 온 제주는 완연한 초여름 날씨다. 비 때문에 우중충했던 서울과 달리 이곳은 파스텔로 칠해 놓은 듯 알록달록 예쁜 풍경들이 나를 반겨준다. 그림 같은 파란 하늘 아래 말갛게 세수한 듯 멀끔한 얼굴의 한라산 그리고 이국적인 느낌을 불어넣는 길 가의 야자수들. 짧은 일정에도 제주는 언제나 설렘이다. 저렴한 티켓을 골라 오후 비행기를 탄 탓에 이미 해는 뉘엿뉘엿, 파랬던 하늘은 어느새 불그스름한 노을로 물다.

제주 동문시장

 언제나처럼 집에 가는 길에 동문시장에 들렀다. 좋아하는 오메기떡과 한라봉 과즐을 사 갈 참이다. 주말인 걸 잠깐 잊고 있었는데 토요일의 야시장 먹자골목은 맛난 간식거리를 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코로나 발발 이후 오랜만에 보는 낯선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한참을 감탄만 하고 서있다가 마침내 사람들 틈을 비집고 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호객하는 상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오메기 떡집으로 직진. 오메기떡은 호불호가 갈리는 제주 전통 떡이다. 제주에서는 예전에 제삿날에나 구경할 수 있던 귀한 떡이라 그런지 가격도 꽤 나간다. 그래도 팥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주전부리다! 비싸다며 눈치를 주는 꼼군을 뒤로하고 꿋꿋하게 몇 개를 사서 담.


 늦은 저녁을 먹으러 시장 근처 밥집을 찾았다. 8시가 넘은 시간이라 그런가? 손님 하나 없이 텅 빈 식당이 약간 못 미더웠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일단 안으로 들어섰다. 대표 메뉴라는 소고기 해장국과 제육덮밥 하나를 시키곤 맛없으면 어쩌지... 불안해하며 초조해하길 십여분. 정갈한 반찬과 고기가 가득 든 해장국, 그리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제육덮밥이 등장했다.

제주이모네 소고기 해장국

 맛집을 찾았다는 기쁨과 안도가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 둘은 늦어진 저녁 탓에 말 한마디 없이 허기를 채우는데 열중하고 뱃속이 어느 정도 차오르자 내일의 일정을 생각해 볼 여유가 생긴다.


 이번 제주행도 역시 집을 손보기 위한 짧은 방문이다. 몇 달 새에 잔디마당은 (심은 적이 없는) 꽃밭이 되었고 집 앞은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 정글을 연상시킬 정도다. 집 외부의 CCTV가 고장이 나 한 달 동안 확인을 못해서 상태가 이렇게 심한 줄은 몰랐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잡초의 생명력이!

꼼군은 잔디 깎을 생각에 벌써부터 한숨데 나는 제주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냥 좋다.


 집을 래 비워놓는 것이 걱정돼 얼마 전부터 집을 한달살기 숙소로 내놓았는데 이번에 오셨던 가족은 집을 나보다 더 깨끗하게 청소해놓고 가셨다. 정년퇴직 후 꼭 제주에서 한달살기를 하기로 아내분과 약속하셨었다며 조용하고 깨끗한 곳에서 잘 머물다 간다고 고맙다는 문자까지 남기셨다. 제대로 얼굴 한번 뵙고 인사도 못했는데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인복이 있는 건지 우리 집엔 항상 이렇게 좋은 분들만 오신다. 2월에 머무시고 7월에 다시 예약한 어여쁜 한 교수님은 계시는 동안 멋진 동영상을 찍어 보내주셨다. 집을 얼마나 예쁘게 찍어주셨는지 영상으로도 애정이 묻어났다. 또 한 분은 어린이집 교사셨는데 그동안 힘들게 일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우리 집에서 만든 좋은 추억으로 힐링하고 가신다고 하셔서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아이가 있던 한 가족은 아이들이 전날부터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울며 보채더라며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 집에서 행복한 기억을 만든 분들이 나도 행복하게 만든다.  그저 집에 사람이 없으면 쉽게 망가진다는 말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좋은 사람들, 행복한 가족들의 기운이 우리 집에 차곡차곡 쌓여 시간이 갈수록 이 집이 더 예뻐지는 것 같다.


 내가 또 집을 비울 한 달 동안 이번엔 어떤 가족이 이 곳에서 행복한 추억을 만들게 될까? 궁금하고 기대된다. 그들에게 편안하고 깨끗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쓸고 닦으며 앞으로도 이 집에 오시는 모든 분들께 행복한 추억과 기억을 줄 수 있는 집이 되라고 격려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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