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오바니 Apr 12. 2021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 날 행복하게 해주는 게 아니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리할 시간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매달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있다. 7월 휴가시즌까지는 다시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올 일이(핑계가) 생긴다.
 하나 휴직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주말을 껴서 꾸역꾸역 2박 3일씩 가던 것을, 비행기가 싼 시간을 골라 여유롭게 주중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

 2만 원도 채 안 되는 편도 비행기를 끊고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심한 중국발 황사로 비행기마저 노랗게 뒤덮인 오늘 날씨는 아랑곳없이, 제주행 비행기는 월요일 오후에도 여전히 만석이다.

 이번엔 봄이 가기 전에 나무를 심으러 간다. 봄이 지나면 나무 시장에 가도 남은 것이 없다. 작년 여름부터 이곳저곳 둘러봤지만 제주시 산림조합에서 하는 나무시장은 이미 문이 닫혀 아무것도 살 수가 없었다. 일반 농원보다 그곳 나무가 좋고 저렴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봄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마침 얼마 전에 제주시 산림조합 나무시장이  새단장을 마치고 문을 열었단다. 올해 봄을 놓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니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행기에 앉아 무슨 나무를 살까 생각하는 것부터 벌써 설렌다. 그 흔한 화분 하나 내가 직접 키워본 적이 없고 회사 책상 옆에 있던 큰 화분을 말라죽여 너무 미안했던 나지만, 지난번에 내려와 새 흙을 덮어 만든 자투리 땅에 꼭 나무를 심어 우리 집 정원을 완성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는 중이다.

 그 나무 중 가장 예쁜 나무를 하나 골라 우리 아이 이름을 단 명패를 만들어 걸어줄까? 그러면 아이가 쑥쑥 크는 것만큼 예쁘게 자라라며 애정을 더 쏟게 되겠지?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다 보니 나중에 그 나무가 아이 키 보다 더 커져 아이를 내려다보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모습이 벌써 눈 앞에 그려진다.


 아직 나무를 사지도 않았는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고 있는 중이다.

제주시산림조합 가든센터

 나무시장에 도착해서 다양한 묘목들과 꽃나무들을 보니 어릴 적 보물찾기 할 때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던 딱 그 느낌이다.

집이 완공되었을 때부터 나무 타령을 했었는데... 3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나무를 살 수 있을 때 사러 갈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회사에 다닐 땐 항상 이런 일들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 있게 마련이다. 리스트 위쪽에 적힌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고 여겨진' 일들을 하다 보면 우선순위가 높지 않은 나무 심기 같은 건 차례가 올 여지가 없었다.

측백나무과와 꽃화분

렇게 어렵게 가진 기회이기에 마음도 바쁘고 눈도 쉴 새가 없다. 이것도 심고 싶고 저것도 심고 싶고, 보는 족족 다 사고 싶지만 해발 500미터 중산간의 겨울과 나의 부재에서 올 관리의 소홀함을 견딜 수 있는 나무들로만 골라야 한다.

끝까지 고민했던 골드콘

 그래서 처음부터 너무 욕심냈다가 다 죽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소심하게 애기동백 3그루, 광나무와 황칠나무 1그루, 그리고 제주에서 귤나무 안 심으면 섭섭하니 귤나무 중 가장 손이 덜 간다는 하귤나무 2그루를 데려왔다.

난생처음 해 보는 나무 심기에 땀은 삐질, 몸은 흙투성이에 난장판이지만 마음만은 베테랑 농사꾼이 부럽지 않다.

문 앞에 심은 애기동백

 이제는 이 아이들이 죽지 않고 잘 자라주길 바라는 것만 남았다.


 이렇게 우선순위에서 한참 벗어난 일들을 하며 그 '긴급하고 중요했던' 일 들을 해냈을 때 보다 몇 곱절은 더 기쁘고 마음 뿌듯하다는 걸 발견했다.

 삽질을 하고 손으로 흙을 쓸어 담으며 머리에는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정신적 명료함과 육체적 노동에서 오는 성취감이 날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이젠 무엇을 기준으로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건지 좀 감이 온다. 지난날의 긴급하고 중요했던 일들이 날 이 정도로 행복하게 해 주진 않았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의 하늘을 돌려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