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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Jun 18. 2021

우리의 소울푸드는요...

컵라면과 맛김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건 시각, 청각 그다음은 후각쯤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특정한 음식은 가끔 그 음식과 연관된 온갖 추억들을 불러오는 강력한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인생의 특별한 순간을 함께한 음식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부부에게도 그런 소울푸드가 하나 있다.

(이번엔 순댓국은 아니다!)


 신혼여행에 대한 로망이 살아있던 시절, 내겐 오래전부터 꼭 가고 싶던 신혼여행지가 있었다. 영국에 있을 때 함께 일했던 동료 중 하나의 고향이었던 모리셔스. 그 친구를 만나기 전까진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던 아프리카 대륙, 인도양의 작은 섬. 몰디브보다 더 먼 곳에 있어 한국 사람들에겐 낯선만큼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에겐 그 당시 멕시코의 칸쿤, 미국의 뉴욕 등과 더불어 나름 이름난 신혼여행지였고 다른 유럽 국가 사람들도 자주 찾는 휴양지였다. 그때부터 난 언젠가 결혼하면 꼭 모리셔스로 신혼여행을 가겠다 마음먹었고 그로부터 10년 , 결혼을 앞 나는 그 다짐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로 했다.


 착한 꼼군은 그 당시 모리셔스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내가 가고 싶다고 하니 동의를 해주었고 모리셔스 신혼여행 상품을 파는 곳을 이 잡듯이 수소문해서 찾은 작은 여행사에 가까스로 예약을 했다. 지금은 나름 알려진 휴양지가 되었지만 10년 전엔 이름을 들어본 사람조차 찾기 힘들었고 다른 건 차치하고 아프리카라는 타이틀에 우리 부모님은 정말 크게 당황하셨다. 고작 일주일 신혼여행을 가면서 직항이 없어 24시간을 꼬박 가야 하는 그곳을 고집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꼼군에게 참 미안하다. 설상가상으로 모리셔스 국적 기안에서는 심지어 싸움이 날 뻔했다. 우리 좌석에 떡하니 앉아있는 뚱뚱한 흑인 여성 승객들이 좌석번호를 보여줘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 아닌가! 더 화가 났던 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승무원이 우리 커플을 보고 그냥 다른 빈 좌석에 앉으라고 하는 거였다. 나름 항공사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그런 몰지각한 행태는 참아줄 수 없었다. 비행기 좌석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바꾸면 안 된다. 혹시라도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해 좌석 리스트(Passenger Manifest)와 실제 승객이 매칭이 되어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그런 규칙을 어기는 것 싫었지만 그들의 태도에서 아시아인이라고 약간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를 느껴서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다(난 화가 나면 영어가 더 잘 된다!). 오랜 시간의 실랑이 끝에 자리를 탈환한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를 몇 번 갈아타고 마침내 모리셔스에 도착했다. 그렇게 꿈꾸던 곳에 왔지만 우리는 여독으로 진이 다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신혼여행을 갔던 11월은 생각보다 그리 날씨가 좋지 않았고 섬이니 만큼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저 생각나는 건 무언가 먹어야겠다는 본능뿐이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 기내 음식 탓에 오랫동안 주린 배를 채워야만 했 우리는 한국에서 챙겨간 새우탕맛 컵라면과 작은 맛김치를 꺼내어 새가 밸 새라 리조트의 테라스 향했다.


 오랜 비행으로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과연 무얼 먹을 수나 있을까'라는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맛김치 한 점과 함께 얼큰한 라면 국물을 들이켜는데 세상에나... 어떤 진수성찬도 이보다 더 감동스러울 수 없다. 우리는 똑같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감탄사를 주고받았고 그제야 모리셔스의 에메랄드빛 바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맛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시장이 반찬이다'와 해외에서 먹는 한국의 맛, 드디어 10년을 기다리던 이 곳에 진짜 와 있다는 꿈같은 기분, 그리고 이제 내 평생짝꿍이 생겼다는 기쁨. 이 모든 것이 혼합된 그 맛 그날의 날씨와 바람소리, 냄새, 감촉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후 우린 그 컵라면을 볼 때마다 모리셔스를 떠올린다. 한국에서 3박 5일 일정으로 왔다고 하니 황당해하던 유럽의 장기 여행객들과 아침마다 리조트에서 직접 짜주던 과육 가득한 지금도 생각나는 찐 오렌지 스, 하루 종일 대절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괜찮다는데도 자꾸만 우리를 데려다주던 짝퉁 명품을 팔던 상점들, 생애 처음 해 본 바닷속 걷기 체험, 알고 보니 제주도와 같은 화산섬이어서 모리셔스 곳곳에 쌓여있던 현무암 무더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10년 뒤 아이가 생기면 꼭 함께 다시 오자 했던 약속.


 작년에 맞은 10주년 때 그 약속을 못 지킨 건 코로나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었지만 만일 코로나가 아니었다 해도 다시 그곳에 갔을지는 미지수다. 가끔은 추억은 그대로 남겨둬야 예쁜 법이고 무엇보다도 그곳을 다시 3박 5일로 다녀오고 싶진 않다! 또 한 가지, 우리의 소울푸드에 대한 추억을 업데이트하고 싶지 않 의도도 있다. 혹시라도 시 재연한 그 맛이 기억에 못 미친다면 인생의 소울푸드 하나가 없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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