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오바니 Jun 23. 2021

잃어버린 자매의 시간

잘 지내고 있지...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이 시간에 전화할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다. 런던에 살고 있는 동생에게다. 시계를 보니 동생은 이제 슬슬 식당 문을 닫을 준비를 할 시간이다. 몇 년 전 영국으로 이민을 감행했던 동생네 가족은 런던 시내에서 한국식당을 운영하며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식당을 계약하자마자 맞은 코로나 여파로 개업을 6개월이나 미루며 아까운 임대료만 내던 시기도 있었지만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 그 힘든 시기를 기적적으로 버티어 .


 주변이 시끄러운걸 보니 역시 가게인가 보다.

"이 시간에 안 자고 뭐해?"

"응 그냥 잠이 좀 안 오네. 장사는 좀 돼?"

"얼마 전부터 실내에 손님을 받게 해 줘서 그냥저냥 먹고는 살아"

"문 닫을 시간 다 됐겠네?"

"응 밤 10시까지 영업이라 이제 슬슬 마감하고 있어."


 건조한 대화들이 오가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3년 전 영국 출장길에 마지막으로 봤던 조카들이 훌쩍 커서 어느새 식당일을 고 있다 정감 있는 이모 조카 사이는 아니었지만 엉덩이를 두드려주고 싶을 정도로 대견하다 말을 덧붙인다.

런던에 있는 동생네 식당, SEOUL90

 동생과 나는 한국에 함께 있을 때에도 살가운 자매 사이는 아니었다. 이는 한 배에서 나왔지만 너무나도 다른 성격과 극과 극을 달리는 관심사 때문이기도 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나의 유학생활과 동생의 이른 결혼으로 함께 청춘을 즐긴 기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생은 꾸미는 것엔 젬벵이었던 나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예쁜 것을 좋아했고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게 커서는 자연스레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어 방송국에 다녔고 후엔 프리랜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야무진 손기술은 인정하는터라 나도 중요한 일이 있으면 동생에게 메이크업을 받곤 했다. 심지어 동생은 자신의 결혼식 날에도 직접 내 화장을 해주었다. 결혼식 당일 신부가 해 주는 화장이라니...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그 덕에 예쁜 신부 언니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부터는 헤어 교육도 받아 머리도 직접 손대기 시작했다. 그 덕에 돌잔치를 하는 엄마들의 올림머리와 메이크업을 전문으로 하며 여기저기 꽤 바쁘게 불려 다녔고 이민을 가서는 그곳으로 공연을 온 한국 연예인들의 메이크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그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연년생인 우리는 어릴 때부터 지독히도 싸웠다. 1년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힘으로도 제압이 안됐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입을 닫아버리는 나와 그런 것을 못 참아하는 동생은 항상 부딪히면 싸움이 났다. 왜 그렇게 동생을 참아주기 힘들었을까? 친척이 많은 것도 아니고 피붙이라곤 둘 밖에 없는데 내 사춘기를 돌아보면 동생과의 불화로 힘들어했던 기억이 많다. 무엇이 문제였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는 걸 보면 내가 속이 좁은 언니였다는 결론이 난다. 조금이라도 언니였던 내가 한 발 양보하고 조금만 너그럽게 굴었다면 어땠을까. 뒤늦게 후회밀려온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유학을 간 5년 동안 동생은 한 번도 날 찾아오지 않았었다. 나 같았으면 놀러 가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텐데... 물론 그 아이도 일을 하느라 바빴고 그 당시 생애 처음 시작한 연애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런던에 와서 비달 사순과 같은 학교에 다니며 좀 더 공부하라고, 내가 있으니 몸만 오면 된다고 여러 번 얘기했었는데 끝내 한번 오지 않고 대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버렸다.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결혼을 한 후엔 내가 없는 자리를 듬직한 제부가 채워 우리 부모님까지 잘 챙겨주었기에 참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그때 같이 영국에서 공부하며 지냈다면 우리 사이가 지금보다는 좀 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렇게 한 번을 안 오던 영국에 지금 동생이 살고 있다! 어떻게 된 운명인지 그간 해외에 한 번도 안 가본 아이가 이민을 원하는 남편을 만나 뉴질랜드에서 5년을 보냈고 지금은 영국에서 자리를 잡아 네 식구가 알콩달콩 낯선 나라에서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잘 살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모든 은 각자에게 맞는 때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타국 생활을 힘들어하며 정신적으로 무너는 듯하며 위기를 겪었던 아이가 이제는 해외생활 10년이 다 되어가니 영어도 제법 늘었고 가족과 함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삶을 견뎌내며 잘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로 근 3년을 넘게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가끔씩 화상통화 너머로 보이는 동생의 얼굴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 보 안심이 된다. 나이가 드니 가까이 있지 않아도 어딘가에 내 피붙이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다음번에 만나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언니답게 푸근한 마음으로 동생을 대해야지. 굳게 마음먹는다. 아쉽게 보낸 지난 세월을 보상받듯 할 수 있을 때, 시간이 허락할 때, 그때를 놓치지 않고 뒤늦게나마 언니 노릇 한번 제대로  봐야겠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철이 든 언니를 받아준다면 말이다.


"보고 싶다 동생아..."






 

작가의 이전글 공부하는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