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같은 비바람이 지나간 뒤 고요한 아침이 찾아왔다. 정말 언제 그랬냐는 듯 지저귀는 새소리와 다시 찾아온 정적이 거짓말 같다. 태풍도 아니고 그저 장마인데 별일 있겠냐며 데크에 내어놓은각종 기물들이 마당에 온통 널브러져 있다. 비가 그친틈을 타 아이들이 놀았던 이동식 수영장은 덮어 놓은 방수포가 일찌감치 벗겨져 물에 동동 떠있고 아이들이 앉던 자그마한 플라스틱 의자는 마당 한복판까지 날아갔다. 분위기 좀 내보자며 갖고 내려온 커다란 알전구 들은 밤새 춤추는 듯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었는데 다행히 깨진 건 없는 듯하다.
이곳에 있으면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 한없이 작아진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자연을 거슬러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양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보지만 곧 깨닫게 된다. 자연이 스스로 허락할 때까지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올해 1월 이곳에서 한 달을 혼자 지내며 일주일간 눈에 고립되었을 때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곧 또 알게 되었다. 제주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며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을.
잠깐 소강상태였던 비가 또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예전 같았으면 그칠 듯 그칠 듯하며 애를 태우듯 내리는 비가 야속했을 텐데 이제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애를 태우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다행히 장마가 오기 전 주어진 3일의 시간 동안 아이들은 해변에 가서 물놀이도 했고 마당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 수도 있었다. 벼르던 야외 창고도 설치를 했으니 해야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비가 오니 좋은 점이 하나 있다. 불빛만 보면 뛰어들던 날벌레들이 사라졌다는 점. 잔디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산다는 건 온갖 벌레들과의 동거를 뜻한다. 그나마 바닷가보다는 덜 습한 중산간이고 주변에 나무가 울창한 곳이 아니어서 1-2년까지만 해도 딱히 집안에서 해충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집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우리 집도 작년부터 해충들의 습격을 받았다. 벌레라면 혼비백산하는 우리 식구는 당장에 방역업체를 수소문했고 그로부터 쭉 한 달에 한 번씩 관리를 받으며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이제 문제는 해충이 아니라 익충 즉 곤충들이다. 곤충은 딱히 박멸을 해야 할 대상이 아니니 약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일단 다리가 2개 이상 달린 생명체들은 메뚜기든 귀뚜라미든 집 안에는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제발) 큰 맘먹고 바꾼 튼튼한 방충망 덕에 웬만한 아이들은 마당에서만 만날 수 있는데 작은 거미들은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가끔씩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까꿍 하며 인사를 하는 통에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마저도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을 먹으며 창 밖에 붙어있는 작은 거미를 보고 "거미 거미 거미야~" 하며 콧노래를 불렀더니 꼼군왈 "이젠 비명 대신 노래를 부르는구나. 제주댁 다 됐다."며 웃는다.
10여 년 전 처음 제주에 왔을 때 토박이 언니들과 여름에만 오픈하는 해변가 계절 식당에 갔을 때 일이다. 백숙, 곰장어 등을 파는 그곳에 둘러앉아 맛나게 저녁을 먹는데 어디서 "윙~"하며 항공모함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내 주먹만 한 커다란 날개 달린 바다 바퀴벌레가 내 옆에 턱! 하고 내려앉는 것 아닌가. 나는 '꺄악!!!!!!' 놀라 뒤로 나자빠졌고 토박이 언니들은 이런 내가 우스운지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며 손으로 그 벌레를 스윽 바깥으로 밀어버렸다. 미동도 없는 언니들 틈에서 육지에서 온 티를 너무 낸 것 같아 엄청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그 벌레를 본다 해도 여전히 무서울 것이 뻔하다. 하지만 조금씩 다리 많이 달린 작은 생명체들에 대한 내성을 키워가며 주택에 사는 이의 필수 덕목을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