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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Aug 09. 2021

아이와 함께 더 커진 세상

 이 얼마만의 산책인가. 낮에 퍼부은 소나기로 잠시 주춤해진 열대야가 다시 돌아올세라 아주 오랜만에 저녁 산책에 나섰다. 항상 구부러져 있던 다리로 빠른 걸음을 걸으려니 이미 굳어버린 손으로 글씨를 쓸 때처럼 색한 몸짓에 몸 여기저기가 삐그덕 댄다. 근육이 다 빠진 허지는 출대고 아직 걷기에 적응이 안 된 골반은 이리 비틀 저리비틀이다.  


 그래도 피부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그저 좋아 삐걱대는 으로 최선을 다해 균형을 잡아본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잠깐 마스크 밖 공기를 마주한 콧속엔 싱그러운 풀내음이 훅 들어온다.  수만 있다면 집에 담아 가져가고 싶을 만큼 머릿속까지 상쾌해는 자연의 향이다.


 하천가 산책길엔 나처럼 오랜만에 자연풍을 맞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무리 좋은 에어컨이라도 산에서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을 능가할 기술은 없다. 가끔씩 너무 덥다 싶은 날엔 제주도 거문오름에서 만났던 풍혈이 생각난다. 푹푹 찌는 한 여름 올랐던 오름의 깊은 숲 속, 그 어딘가 돌 틈에서 새어 나오는 서늘하다 못해 온몸이 오싹 해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에 화들짝 놀랐던 기억.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자연 에어컨 앞에서 한참 동안 땀을 식혔더랬다.


 하지만 여기는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땀을 식혀주기엔 역부족이다. 금이라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주길 간절히 바라며 잰 발걸음을 옮긴다. 열대야가 덮쳤던 몇 주 동안 차마 걸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저녁 산책길은 그새 몰라볼 정도로 푸르러졌다. 낮은 풀밭 너머로 훤히 보이던 고추밭은 그 앞에 풍성하게 잎을 낸 나무 뒤에 가려져 한 치도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 싹을 냈던 꽃들과 잡초들도 1년 중 최대 전성기를 맘껏 누리려는 듯 길 안쪽까지 있는 대로 몸을 부풀리는 바람에 산책길이 비좁아 보일 지경이다.


 꼼군과 한참을 걷다 보니 함께 남산에 올랐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다. 출산예정일, 방문한 병원에서 아무 소식이 없다며 운동이 덜 된 거라고 담당 선생님께 혼나고 나온 참이었다. 그 말에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바로 남산으로 향했다. 그리곤 주저 없이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꼼군과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차올랐는지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보면서도 힘들단 생각도 못했다. 만삭의 임부를 위태롭게 쳐다보는 시선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쉬지 않고 산을 올랐다. 다행히도 무사히 정상까지 올라 기념이라며 사진까지 찍고 태연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새벽, 운동 효과를 톡톡히 보며 마침내 우리 공주님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 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다 산 정상에서 진통이 왔으면 어쩔 뻔했나... 약간 아찔하다. 그때는 엄마가  되기도 전인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뱃속에 있는 아이가 힘들고 답답할까 봐 어떻게든 빨리 꺼내 주고 싶은 마음, 그 생각뿐이었다. 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꼼군의 손을 잡고 차근히 계단을 오르며 태어날 이를 설레며 기다리던 것이 바로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어느덧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그때처럼 여전히 손을 잡고 풀내음 가득한 산책길을 함께 걷는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 둘만 존재하던 세상에 이제 우리 둘의 존재보다 훨씬 더 커진 아이가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더 커진 세상에서 나는 엄마, 그는 아빠가 되었고 그렇게 우린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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