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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Sep 01. 2021

내 인생의 보호자

연양갱이 남긴 것

 전쟁 같던 밤이 지났다. 암막커튼을 뚫고 비쳐 드는 햇빛에 살았구나, 안심이 된다. 어젯밤 갑작스레 찾아온 복통으로 응급실 신세를 졌다. 밥을 먹고 입이 궁금해 하나 까먹은 연양갱이 문제였다. 수액과 진통제를 맞으며 위아래로 다 쏟아내고 나니 그제야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소화기관이 약한 나는 입에 무언가를 넣을 때마다 조심해야 하는데 가끔씩 그걸 깜박할 때가 있다. 연양갱을 먹었다는 사실도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낸 후에야 비로소 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장 걱정되는 건 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걸 본 우리 아이였다. 잠을 자다 뛰쳐나와 내 옆에 앉아 한없이 울던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왕방울만 하게 부어 쌍꺼풀이 두 겹이 져있다. 눈을 뜨자마자 병원에서 돌아와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나를 보곤 또 눈물을 글썽이며 꼭 껴안아 준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나도 울컥 눈가가 촉촉해진다. "엄마가 걱정시켜서 미안해" 하자 "아니야 미안해하지 마 괜찮아 이제 안 아픈 거지?" 라며 어른스럽게 말하는 아이가 고맙고 대견하다.


 제주에 내려오기 며칠 전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던 게 화근이었던 듯하다. 예민한 위장 탓에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소화가 안 된다. 게다가 아무리 내 집에 가는 거라 해도 코로나 시국에 부모님까지 모시고 제주에 내려오는 건 확실히 마음 쓰이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려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자 부모님은 바로 다시 올라가자며 시고 나는 부모님이 어렵게 낸 시간이 물거품이 될세라 회복이 덜 된 몸으로 이제 괜찮다며 활짝 웃어 보인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관광을 시켜드리자 마음먹고 내려왔는데 첫 단추부터 말썽이라 속이 상한다. 부모님은 이 집에 오면 나처럼 일할 거리부터 찾으신다. 어디 고칠 곳은 없는지 손볼 곳은 없는지 청소할 곳은 없는지 내가 혼자 낑낑대며 힘들어할까 봐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일을 하신다. 병원에 다녀와 새벽에서야 겨우 잠들어 아침에 느지막이 눈을 떠보니 첫날부터 쓰러진 딸이 안쓰러운 엄마 아빠의 손이 새 더 바빠져 있다.

 여름 내내 설치해놓은 야외수영장에 낀 누런 물때를 닦아내느라 엄마는 아침부터 수세미를 들고 수영장 바닥을 기어 다니시고 아빠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지름 3미터짜리 수영장을 번쩍 들어 물로 씻어내신다. 어제저녁 내 발목을 긁어 상처를 낸 잡초 덤불을 잘라내느라 엄마는 눈밑에 땀띠가 다 나셨다. 당신이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할 것이 뻔하니 계시는 동안 팔 걷어붙이고 동분서주하시는 모습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러려고 모시고 온 게 아닌데...


 어젯밤도 엄마 아빠가 아니었다면 아이와 나랑 둘이서 어떻게 그 고통스러운 밤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우리 엄마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곤 재빨리 양손 양발을 전부 사혈 한 뒤 피를 돌게 했다. 그 덕에 난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응급차에 올랐고 새벽 4시까지 꾸벅꾸벅 졸면서도 내 옆을 지킨 아빠는 병원에서 계속 내 팔다리를 주무르며 날 보살펴주셨다. 혼한 뒤 처음으로 아주 오랜만에 시 내 보호자로서 말이다.


 효도하자고 모시고 왔는데 오히려 내가 두 분께 이런 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으니 송구한 마음이다. 그리고 연세가 아무리 드셔도 자식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어릴 적 알약이 목에 걸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기다랗고 커다란 알약을 먹을 때마다 무서웠다. 그리고 그날 정말로 상상만 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숨을 못 쉬고 컥컥 대는 내 등을 내려치다 되지 않자 아빠는 손을 목까지 집어넣어 걸린 약을 빼냈다. 그날의 공포와 엄마 아빠의 다급하면서도 신속한 손놀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내리사랑을 나도 아이에게 주게 되겠구나...' 눈을 감고 누우 드러누운 내 얼굴 위로 비쳐 든 걱정 한가득 담긴 부모님의 얼굴이 생생히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날 보살피던 그 얼굴에서 주름이 조금 지고 머리는 하얘졌지만 자식이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던 그 모습은 그대로다.


 엄마 아빠가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건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얄미운 연양갱이 알려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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