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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Oct 28. 2021

깨지 않는 악몽

 책장을 넘기다 '앗' 손가락 사이로 피가 스며든다. 날카로운 종이에 손을 베는 일은 생각보다 꽤 자주 일어난다. 자칫 잘못해서 이상한 각도로 책을 들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차 하는 순간에 이렇게 습격을 당한다. 베어 나오는 피를 닦고 상처를 살펴보니 엄지와 검지 사이에 꽤 긴 상처 자국이 보인다. 아마도 한동안은 계속 신경이 쓰일 분위기다. 새로운 일적응하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회사 내부의 상황으로 고민하랴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올 정도로 온몸이 만신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이에 베인 아픔에도 반응할 정도의 정신은 있어 외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첫 월급날을 향해 가는 날짜가 믿기지 않을 만큼 시간은 쏜살같다 못해 빛의 속도로 앞으로 전진 중이다. 입사 후 네 번째 맞는 주말. 이제는 매일 자연스레 노트북을 집으로 가져와 잠이 들기 전까지 일 하는 것에 익숙해졌고 주말엔 일주일 동안 축난 몸을 추스르느라 열심히 먹어댄다. 얇은 블라우스 하나 입고 출근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겨울 코트에 내복까지 껴입 선 내 모습이 차창에 비친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그 어둠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기차 역사 내의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 부신 눈을 비비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면 한주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잊고 있던 허기가 확 몰려온다. 따스한 온기가 훅 풍겨오는 집안에 들어서면 토끼 같은 딸내미가 달려와 내 품에 와락 안긴다. 아이의 머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또다시 새벽 공기 마시며 문 밖을 나설 슬며시 피어오다.


 런데 이 회사는 주말에도 날 가만두지 않는다. 프랑스에선 퇴근 후에 연락을 하면 법으로 처벌을 받는다던데 에겐 여전히 머나먼 나라 얘기다. 처음엔 주말에 날아오는 카톡이나 이메일에 바로바로 답을 하며 넙죽넙죽 주어진 일을 해냈다. 하지만 얼마 안가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론을 내렸다. 평일에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끼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일에 매몰되어 사는데 주말에도 이렇게 살 순 없는 노릇이. 일주일을 일에 매여 사는 삶이라니... 그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조여 오는 것만 같다. '내가 살고 봐야지 그깟 월급이 다 무슨 소용이던가...' 상사에게 카톡이 온 걸 알면서도 핸드폰을 저 멀리 던져두고 불편한 마음마저 애써 모른 척한다. 

이는 무작정 늪에 빠져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것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처음부터 분명히 하지 않으면 결코 내가 이곳에서 오래 버텨낼 수 없음을 알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내가 어디까지 참아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자정이 다 된 시간까지 울려대는 상사의 카톡 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내용을 보지 않은 카톡은 결국 꿈속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기어코 괴롭히고야 만다.


이 악몽의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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