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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Nov 04. 2021

하루살이

오늘만 살기로 했다.

 한 달간 맡았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발표와 회의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무사히 해냈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한 달간 좌충우돌하며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이 고팠던 내게 오늘의 작은 성과는 이곳에서 내 삶을 기대해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겠다 고군분투하며 잔뜩 움츠려있던 내게 오늘의 성취에 대한 답례로 사람들이 보내는 신뢰의 눈빛은 가파른 산길에서 든든한 디딤돌을 찾아 올라 선 기분 들게 다.

  그 덕에 항상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상사에게 조금은 어깨를 펴고 얘기할 용기도 얻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들었을까. 그저 성격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십 년이 넘게 쌓아온 회사 짬밥이 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렇게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일주일 후에 회사 대표를 위시한 보드미팅에서 또 발표를 하란다. 이곳은 발표자료 작성이 업무의 3분의 2가 넘는다. 업무를 해야 보고 할 것이 생길 텐데 보고가 본 업무보다 더 많으니 도대체 일은 언제 하고 소는 누가 키우나!

 결국 첫 번째 보고가 끝난 지 하루도 안되어 또 머리를 싸매고 아직도 다 이해하지 못한 다양한 숫자, 도표들과 씨름을 시작한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꼭 그 꼴이다.

그래도 한 편으론 매일매일 할 일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당장에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샌가 나도 '적응'이라는 걸 할 수 있진 않을까. 그렇게 '나의 처음은 정말 뒤죽박죽 엉망이었지' 라며 영웅담을 얘기할 날이 오진 않을까.


 처음엔 정말 내가 문제라생각했다. '나이가 들어가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업무를 긴장감 없이 하던 그 세월에 나의 경쟁력이 무뎌졌구나.' 친한 언니에게 하소연을 하니 적응이라는 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 당연히 이전보다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며 너무 진빼지 말고 몸과 마음에 시간을 주라 한다.

 리고 아무리 봐도 평범하지 않은 회사 시스템이 날 허덕이게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로벌 다국적 기업의 한국 법인이라는 이곳은 한국의 다른 어떤 회사와도 비교하기 힘든 복잡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 업무에 꼭 필요한 인트라넷과 같은 시스템이 한 10개 정도가 되니 무엇을 어디에서 찾아봐야 하는지 몰라 그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다. 게다가 계속해서 의무로 받아야 하는 교육들이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옮겨가며 업무 시간에 대놓고 교육을 받지 못하니 집에서든 차에서든 시간을 따로 내어서 수료를 해야 한다. 그뿐인가 이름 옆에 붙은 직함이 몇 개씩 되는 임원들이 100명이 넘는데 그 직함의 영문 약자가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 큰 일이다.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서 본부장이 되었다가 부대표가 되었다가 한국지역 비즈니스 개발 담당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100명이 넘는데 그들의 얼굴과 이름 심지어 비서 이름까지 외우란다. 어제 점심에 뭘 먹었는지도 잘 기억 못 하는 나에게 말이다!


 역시나 무리였던 걸까? 불혹에 이직이란 건.


 한번 봐선 도저히 외울 수 없어 A3에 인쇄를 하고 형광펜으로 줄을 쳐 가며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매일 들여다본다. 얼굴도 모르는 높으신 분들의 이름을.


 결국 난 이곳에서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 아이러니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루살이.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에만 집중한다. '하루에 한 명씩 이름을 외우다 보면 언젠가 100일이 지나있겠지.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면 내일 또 다른 일이 주어지겠지. 그렇게 하나씩 하다 보면 내가 해 놓은 일들에 기대어 그다음 날을 기대해볼 수 있겠지.'


난 오늘부터 내일을 걱정할 필요 없는 하루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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