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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Apr 06. 2022

글쓰기 근육의 팔 할은 성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매일 운동을 해서 근육을 키우듯 습관처럼 글을 써야 하는데 이직 후 마음이 온통 콩밭에 가 있으니 글이 써질 리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쓰는 건 땅을 파는 행위와 같다고 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땅을 두드리고 흠집을 내고 조금씩 꾸준히 파고들다 보면 어느새 그 땅 아래 깊숙한 곳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한다고... 많은 작품을 완성했지만 그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새로운 땅을 파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어느 것 하나도 미리 파져 있던 구멍에서 쉽게 시작한 것이 없다며 세계가 인정한 글쓰기의 장인조차 글쓰기의 막막함을 고백한다.


 요즘의 나는 겨우내 차갑게 얼어붙은 땅을 조금 두드리다 말고 두드리다 말고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집중이 안 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전혀 모르겠다. 땅이 물러질 때까지 기다리면 조금 쉽게 구덩이를 팔 수 있을까 싶어 매일 커서가 깜박이는 이곳에 출석 도장을 찍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파내려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내가 원하는 깊이까지 파낼 수 없음을 반복해서 깨닫게 될 뿐이다. 이렇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따스한 봄이 곧 찾아와 땅을 녹여주면 수월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내가 선 땅에 봄은 오지 않고 자꾸만 찬서리만 내린다. 겨울이 다시 오려나보다.


 그제 얼마 전 퇴사했던 회사의 임원이 전화를 했다. 어쩌면 내 퇴사 지분의 절반 이상을 갖고 있는 껄끄러운 인사다. 심지어 전화번호도 지워버려 안부를 묻는 그의 문자에 실례지만 누구냐고 회신을 했더랬다. 하지만 그 간의 반목은 벌써 잊었는지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에 난 또 그만 긴장을 놓아버렸다. 그는 회사를 옮긴 지 이제 갓 한 달을 넘긴 내게 자신의 부서에서 함께 일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 황당 말문이 막힌다. 막상 같이 일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때는 나 몰라라 했던 그가 이 타이밍에 내 손을 잡으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퇴사 결정한 후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뒤늦게 손을 내밀었었다. 물론 난 그 제의가 진심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해서, 혹은 혹시라도 나의 퇴사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까 봐 면피용으로 내놓은 카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 포지션에 나를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내가 그에게 보낸 이메일 한 통 이란다.


 퇴사를 결정하고 나서야 나를 돌아봐준 그와 긴 시간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5개월간 나를 밀어내려고만 했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서로 쿵작이 잘 맞는 걸 발견했던 놀라운 만남이었다. 마케팅 분야에서 오래 해온 그와 나는 마케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그 회사에서 동일한 성격의 좌절을 함께 겪고 있었다. 상치 못했던 동질감과 서로를 진작 알아봤더라면 6개월도 안되어 사직서를 쓰진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에 퇴사 전날  마음 가득 담아 짤막한 이메일을 보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메일 한통. 그는 그 메일을 보고 내가 글을 쓰는 일에 진심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그 작은 진심이 자신이 제안하는 포지션에 꼭 필요하다고, 그러니 잘 생각해보라고 덧붙인다. 내 마음속 깊이 묻혀있는 욕망을 들켰다는 것에 대한 창함보다는 날 알아봐 주었다는 생각에 그나마 남아있던 경계의 벽마저 하릴없이 무너져 내다. 참 속도 없다. 내가 왜 그 고생을 했는지 잊었냐며 자책하고 싶지만 이미 지난 일 또다시 내 마음속 상처를 휘젓 것보단 기분 좋은 놀라움에 마음을 맡기는 편이 낫 않나. 


 이렇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통해 다시금 자판을 두드릴 용기를 얻었다. '내가 두드리는 자음 하나 모음 하나가 모여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음에 뿌듯함을 느껴도 된다'라고 '넌 자격이 된다'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꾸준함과 성실함이 모여 어느 날 문득 스스로도 놀랄 만한 자부심으로 돌아올 날이 올 것이라 믿 싶다. 지금은 여전히 녹지 않은 땅을 수십 번 수백 번 두드리고 찍어 내리는 일을 반복해야 하지만 그렇게 힘들여 만든 근육은 언젠가는  일을 조금은 수월하게 만들어  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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