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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Jan 06. 2022

그 겨울의 나와 친해질 수 있길.

트라우마와 추억사이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로 넘어가는 이때가 내게는1년 중 가장 한가로운 시기다. 학교도 크리스마스이브 전날부터 문을 닫았고 1월 11일 다시 개강하기 전까지 3주 정도를 아주 편안하게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도 마지막 주엔 매주 하던 회의도 쉬고 셧다운을 했다. 게다가 재택근무를 핑계 삼아 여유로운 한 주를 보낼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늘어지기 좋은 시기는 없을 성싶다.


 아직 날짜를 적을 일이 없어 새해가 밝았다는 것이 생활 속에서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주 오는 도서관에서 다음 책 반납일이 2022년 1월 16일이라는 안내에 그제야 '아... 해가 바뀌었구나' 깨달아진다.

 처음엔 울상을 하고 따라오던 아이도 이제는 매주 오는 도서관에 제법 익숙해졌다. 어쩔 수 없이  따라오긴 했지만 자리를 못 잡고 서성이던 꼼군도 언제부턴가 입맛에 맞는 책을 하나 골라 한동안 꼼짝 않고 책에 집중한다. 비록 아빠와 딸 둘 다 만화책을 보고 있긴 하지만 책과 도서관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주 도서관에 출석체크를 하는 소기의 성과는 달성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내게도 이맘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편한 마음으로 그간 읽고 싶던 소설책을 뽑아들 수 있는 시기다. 학교 과제에 필요한 책이 아니어도 되고 업무에 굳이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어도 마음 불편하지 않은 이 여유로움에 흠젖어 마껏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책들 욕심을 내 본다.


 허나 연말연시가 언제나 내게 여유로움과 웃음으로 상징되는 시기였던 것은 아니다. 십여 년 전 처음 발을 디뎠던 런던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는 내게 쓰디쓴 커피 같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2003년 겨울. 영국, 런던.

그곳에 도착한 날부터 런던은 내게 춥고 습하고 툭하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싸늘한 도시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맞이한 12월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은 그래서 더욱더 쓸쓸하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그들의 손에 들린 각양각색의 쇼핑백들이 번쩍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어울려 세상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물론 난 예외다. 총천연색의 장식으로 둘러싸여 말 분위기에 잔뜩 들뜬 쇼핑객들 사이홀로 흑백사진처럼 걷고 있던 내 머릿속은 온통 일을 구해야 한다는 급박함 뿐이었다. 당장 다음 달 방세를 내면 바닥을 드러낼 통장 잔고가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날 거리로 내몰았다. 혼자 힘으로 살아남겠다며 부모님 도움 없이 큰소리 뻥뻥 치고 유학을 왔으니 그 뒷감당도 내가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과 이대로 그냥 실패자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잔뜩 짓눌린 나날이었다.

 런던 시내의 모든 상점에 들어가 일자리가 있냐고 물어보는 절박한 얼굴의 동양여자애가 그날 나의 처지였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성격의 내가 결코 할 수 없을 거라 여긴 일이었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수치심이나 부끄러움 따위의 감정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벌게진 얼굴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처음 알게 되었다. 주류에서 동떨어진 주변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와 그 끝 모르게 추락하는 듯한 열등감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들 안에 섞여 함께 즐거울 수 없는 이방인으로 맞는 타국의 연말연시는 정말 외롭고 씁쓸했다.


 그날의 등골 서늘한 불안감과 쓸쓸함을 잊으려 난 항상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트리부터 꺼낸다. 일찍부터 트리에 불을 밝히고 당연히 누려야만 할 절대 불가침의 시간이 온 마냥, 사랑하는 사람들과 꼭 행복하겠다는 의무감으로 점철된 시끌벅적한 연말을 보내고야 만다. 나도 이제 누릴 수 있음을,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님을, 자꾸만 내게 확인시키려는 이 마음이 언제쯤이면 편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화려하게 치장한 트리가 없어도 마음이 허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화려함과 지독한 고독이 공존하는 시기를 보내며 뼛속까지 깊숙이 각인된 외로움을 겪어 봄으로서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의 고마움을 알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그 과거가 더 이상은 트라우마가 아닌 오늘날 감사의 마음을 쑥쑥 자라게 할 좋은 밑거름으로 내 곁에 남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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