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일상의 소중함

by 지오바니

장장 5일 동안 내리던 눈이 드디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지난주 눈 예보에 고립을 예상하며 장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음식이 바닥을 드러내자 약간 긴장이 되던 찰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젯밤까지 지속적으로 날리던 눈발이 오늘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뚝 그친다. 살았구나!


고립된 지 하루, 이틀까지는 낭만이었다.

하루 종일 창 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보며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넷플릭스로 영화도 보고 졸리면 낮잠을 자고 배고프면 먹고 운동이 필요하면 눈을 치우며 의식의 흐름대로 지냈다. 그러나 사흘이 넘어가자 '고독'이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무리 창밖을 바라봐도 온통 하얀색인 저 풍광이 지루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이렇게 마음이 고독에 사로잡히니 오히려 아무런 글도 쓸 수가 없었다. 오로지 아이와 통화할 저녁 시간만 기다려졌다. 비자발적인 격리가 되어버린 상황이 되자 도시가, 사람이 너무 그리워졌다.


스타벅스의 커피 향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침마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가던 스타벅스. 디카페인 라테를 만들어 주는 몇 안 되는 커피숍이 반가워 그곳에서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나오면 '내가 이 맛에 회사 오지!' 라며 아침 시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점심 먹고 친한 동료와 산책하며 떨던 수다. 그 시간이 너무 그립다. 그리고 식탐이 별로 없어 평소엔 음식 생각도 별로 안 하고 지내는데 막상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티브이에 나오는 모든 음식이 왜 그리 다 맛있어 보이는 건지......


그 시간들이 소중했다는 것을 상기하려고 일부러 극단적인 상황에 몰아넣은 것은 아닌데 고립 5일 차에 난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항복을 한 기분이다. 내가 갖지 못하면 더 좋아 보이고 완벽해 보인다. 제주에서의 생활이 그랬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의 직장생활에 신물이 날 때마다 제주에서의 휴식을 꿈꿨다. 그리고 지금 그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되자 다시 도시의 냄새를 그리워하고 있다.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일을 해내며 그 안에서 느꼈던 즐거움, 보람, 성취감도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들이 있기에 제주에서의 휴식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제 앞으로 1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감이 잡힌다. 내게 주어진 엄마, 아내, 딸, 대학원생이라는 역할에 충실히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 안에서 즐거움, 보람, 성취감 그리고 행복을 느끼다 오늘의 고요함이 그리워지면 또 이렇게 이 곳을 찾아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가면 된다.


단, 혼자 고립은 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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