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인연 만들기

일주일 고립 뒤의 조우

by 지오바니

여전히 간간히 눈발이 날리긴 하지만 이제 대설 주의보는 해제되었다. 당분간 큰 눈 예보는 없으니 6일 만에 드디어 비자발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다.

내일이면 바깥 구경을 할 수 있을 거란 설렘에 차 주변에 가득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삽질 몇 번에도 금세 땀이 난다.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눈 치우기에만 몰두하다 보니 며칠간 이어진 함박눈에 몸을 피해있던 새들도 돌아와 '짹짹' 거리며 머리 위를 맴돈다. 그 소리가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 평화로움을 극대화시켜준다.


내일은 육지에서 친한 언니가 온다.

저번 주에 오려고 했던 일정이 계속 이어진 대설 때문에 결국 한 주를 넘겼다. 일 하다가 만난 인연이 이렇게 개인적인 친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 신기하다. 그녀를 만나면 나와 달리 항상 밝은 그녀의 모습에 전염되듯 만날 때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 기분이 좋아진다. 벌써 업무와 관련 없이 사적으로만 만난 지도 5년이 넘어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참 어린 내게 여전히 존대하며 존중해주는 그녀의 성품도 우리 집에 초대하는 것에 단 1초의 망설임도 필요 없던 이유였다. 물론 그녀의 제주여행의 동행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언니, 동생 하며 진짜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되었지만.


돌아보면 내게는 이렇게 일로 만나 사적인 인연으로 남은 사람들이 꽤 있다. 회사를 다니며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도 사람이지만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회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도 사람 덕분이었다. 얼마 전 읽었던 박태현 작가의 '회사를 다닐 수도 떠날 수도 없을 때'에 보면 좋아하지 않되 싫어하지도 않는 전략을 통해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진작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직속 상사 때문에 얼굴이 마비가 될 정도로 힘든 적이 있었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모든 힘듦을 털어놓고 함께 고민해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사람들은 회사를 옮긴 후에도 여전히 언니, 오빠, 동생으로 내 인생에 중요한 인연으로 남아있다.

일을 통해 이런 관계를 얻게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인연들이 더 소중하다. 그리고 추측해 보건대 내가 양한 경로로 만난 사람들과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아마도 사람을 대할 때 벽을 치지 못하고 솔직하게 내보이는, 내 성향이 한몫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십여 년 전, 더 늦으면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무작정 한국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냈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면접을 본 뒤 2주 만에 귀국했다. 처음 맡은 일은 국제회의를 유치하는 마케팅 업무였다. 음악을 공부했던 난 그때까지 그 흔한 프레젠테이션 한번 해본 적이 없었고 오로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과 런던의 한 항공사에서 일했던 경력이 내가 그 회사에 채용된 이유였다. 맨 땅에 헤딩한다는 말은 바로 그런 경우에 쓰는 것 같았다. 이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했던 일은 우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고객이건 협력업체이건 회사 내 다양한 파트를 담당하는 직원이건 누구 건간에 그곳에 적응하려면 무조건 사람들과 친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인 내가 사람들과 빨리 친해진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정성을 가지고 솔직하자'였다. 고객들에겐 꼭 용건이 없어도 수시로 찾아가서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 그 고객이 내게 회의를 한 건 가져다 줄 사람이 아니라 그냥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지인을 만나 재미난 얘기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용건 없이 찾아오는 내게 갸우뚱했던 고객들도 시간이 가면서 내 마음을 알아주고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회사 내에서는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업무를 하는 분이라도 잊지 않고 인사하며 그분들의 대소사에 관심을 가졌다. 미화 업무를 하시는 여사님의 올해 귤 농사는 어떤지, 보안 업무를 하시는 소장님의 아픈 아버님은 좀 차도가 있으신지...... 그렇다고 억지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다가가니 그분들도 차차 마음을 열어주셨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내 사수에게 솔직히 모든 걸 털어놓았고 부끄럽지만 어린 마음에 힘이 들 때면 그 앞에서 울기도 했다. 그 시절 내 어깨를 토닥이며 다독여 주신 사수는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둘도 없는 친한 오라버니가 되었다.


물론 이렇게 속을 다 내보여주면 이런 걸 역으로 이용하거나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회사에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정치'라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난 누구에게 줄을 서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이 편한 쪽을 택했고 그렇게 마음을 맞대고 만난 사람들은 지금도 내 곁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중 하나의 인연과 앞으로 일주일간 제주에서 함께 시간을 보게 되었다. 정말 설렌다. 일주일간 고립 뒤의 조우여서 그 기쁨이 더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제발 날이 좋아 비행기가 무사히 뜨길 바라며 일찍 을 청해 본다.


야호!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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