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휘몰아친 강풍으로 4시간의 기다림 끝에 간신히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다림에 지친 아이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지고 나도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갑자기 허벅다리가 쿡쿡 쑤신다. 아이와 다시 여름에 제주행을 약속했으니 이제 3개월 정도는 제주와 안녕이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 우연히 동창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연락이 끊긴 지 오래여서 전화번호조차 없던 동창을 제주에서 만나다니... 참 우연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이렇게 오래전 알고 지낸 사람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그 당시의 나로 돌아간다.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와 시선에 맞춰 어린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 제법 괜찮다. 그러다 그 간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20년의 세월을 몇 시간 안에 빨리 감기를 하고 나니 비로소 서로의 눈가와 입가의 주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현재의 삶에 지난 시간을 덧대어 서로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인간관계가 엄청 좁은 나에 비해 우리 모교의 교수로 일하고 있는 한 동창은 모든 사람들의 소식을 다 알고 있다. 전공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선 다시금 그 분야 얘기를 듣는 것이 엄청 흥미롭다. 음악으로 쭉 한 길을 걸어온 친구들이 이제는 각자의 분야에서 알아주는 이름들이 되었다니...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아이돌 그룹의 타이틀곡 작곡가가 되어 가끔씩 티브이에 얼굴을 비추는 친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극장과 음악원들의 음향 감독이 된 친구들과 요즘 대세가 된 OTT 서비스로 제공되는 각종 드라마와 영화의 사운드 디자이너가 된 친구, 또 내가 얼마 전 두 번이나 갔던 제주의 미디어 아트 뮤지엄의 음향 디자인은 한 후배의 작품이란다. 요즘 가장 핫한 BTS의 회사와 대형 계약을 맺은 친구까지... 처음 든 생각은 뿌듯함, 대견함과 같은 감정이었다.
그러다 불안정한 내 자아가 또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왠지 그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내가 대열에서 이탈한 미운 오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갈 길 못 찾아 아직도 낯 선 곳을 방황하는 미운 오리. '휴직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얘기를 들으며 불안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가까스로 벗어난 구덩이에 다시 빠질세라 얼른 마음을 다잡는다.
이 나이쯤 되니 살아온 세월이 나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천차만별, 제각각이다. 오늘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깨달은 건, 남에게 잘 베풀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꾸준히 열심히 살 던 친구들이 전부 성공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 기억 속의 그들은 전혀 튀지도 엄청나게 우수한 학생들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은 꾸준했고 자신의 일에 진지했고 또한 선했다. 그래서 그들의 성공은 전혀 배 아프지 않고 절로 함께 기뻐하게 된다.
이로서 내가 갖고 있던 작은 신념, 즉 좋은 인성과 성실함 그리고 인내가 성공의 열쇠라는 것을 또 한 번 확인받았다.
내년에 코로나가 끝나면 다 함께 대대적으로 한번 뭉치자며 아쉽지만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를 마무리했다.
이젠 그다음 만남 때 풀어놓을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각 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잠깐 시간 여행을 한 듯 우연한 만남이 강하고 오랜 여운을 남긴다. 그와 함께 두 달이 다 되어가는 휴직으로 인해 다운되어 있던 내 마음도 조금씩 생기가 돈다. 그에 힘입어 이들이 기억하는 이전의 에너지 넘쳤던 나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기운 내서 이 시간을 견뎌보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