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군도 나도 나이가 먹나 보다. 생전 안 보던 한국 드라마에 꽂혀 역주행 중이다. 스릴러물을 좋아하는 나는 가끔씩 시간이 나면 좋아하는 미국 시리즈를 찾아보곤 했는데 넷플릭스에 가입한 이후론 모든 것이 버튼 하나면 나오니 뭔가에 홀린 듯 계속 리모컨을 손에서 못 내려놓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꼼군이었다.
영화는 좋아해도 이제껏 드라마 재밌다고 한 적 없는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저런 드라마를 봤냐며 내게 추천을 했다. 난 한국 드라마에 관심 없다고 하니 한 편만 보라며 그때 가서 재미없으면 그만 봐도 된다 해서 호기심에 덜컥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것이 이렇게 화근이 될 줄이야.
동백꽃 필 무렵
원래 드라마가 이렇게 재밌던 거였나. 마음 굳게 먹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도 한두 시간만 지나면 어제 보다 만 드라마 줄거리가 궁금해 엉덩이가 들썩 거린다. 큰일이다. 논문 읽을 시간도 없는데 에피소드 한 편 만 보자며 앉았는데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진다. 왜 얘네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꾸 자동으로 다음 화가 나오는 걸까.
비밀의 숲
우리나라는 드라마도 참 잘 만든다. 미국이나 영국 드라마보다 플롯도 탄탄하고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아주 정신이 없다. 게다가 연기자들은 또 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하나같이 자신한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찰지게 맡은 배역을 소화해내는 그들 덕에 나도 덩달아 울고 웃고 때로는 설렌다. 딱히 드라마를 챙겨 보고 산 적이 없어 여태 기억나는 드라마가 한 손에 꼽을 정도인데 뒤늦게 이게 무슨 바람이람!
드라마를 떠올리니 또다시 영국으로 시간 여행을 간다. 핸드폰도 스마트폰이 아니던 10여 년 전, 노트북도 없어 도서관에 가서 시간 예약을 통해 30분씩 인터넷을 사용하던 시절이다. 그때 한인교회에서 빌려온 대장금 비디오테이프를 룸메이트 언니와 밤새 돌려봤다. 우리 방에는 당연히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었고 거실에 있는 주인집 티브이에서 너무 늦은 새벽까지 대장금을 보는 바람에 거실 옆 방에 살던 주인아저씨가 화가 나서 씩씩대며 나와 시끄럽다고 혼을 내던 기억이 났다. 헬스 트레이너였던 그 흑인 아저씨가 우락부락한 큰 덩치로 씩씩 대자 우리는 엄청 쫄아 2층 방으로 줄행랑을 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돌려봐서 화질이 나쁘다 못해 심지어 화면 안에 검은색 줄이 죽죽 그어져 주인공 얼굴도 반만 보이던 그런 비디오를 한국말이 나오고 쳐다만 봐도 배부른 맛있는 한식이 가득하다는 이유로 한동안 멀리 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한국 드라마에 이렇게 정신을 빼앗기며 사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약간 반골기질이 있는 나는 남들이 재밌다면 일부러 찾아보지 않고 무엇이 유행이다 싶으면 굳이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한국 드라마를 보며 왜 이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랑받았었는지, 사랑받은 작품들은 역시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그런데 어쩌면, 드라마도 재미있지만 재택근무와 휴직으로 훨씬 여유로운 저녁을 보내게 된 우리 부부가 나란히 마주 앉아 같은 것을 보며 울고 웃는 이 시간이 더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감정을 느끼고 서로의 반응을 재밌어하며 우리는 점점 더 큰 유대감을 쌓아간다. 나중에 더 나이 들어 함께 추억하며 곱씹을 기억을 만드는 이 시간에 드라마가 그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으니 당분간은 이 즐거움을 밀어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