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후 한 동안은 어디서든 빨리 다시 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그 오랜 세월 기다렸던 휴직이었는데 막상 난 쉴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매일매일 취업 정보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자격증 시험을 보며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비로소야 한숨 돌리고 날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나아갈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마음이 생겼다. 내 등 뒤에서 항상 빨리 결정하라며 등 떠밀던 조급함을 조금은 떼어놓을 수 있는 용기도 끌어모았다.
그러나 여전히 일말의 불안감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 직장생활을 비슷하게 시작했던 친구들이 둘째를 낳음과 동시에 집에 들어앉았고 그 후로 친구들은 결코 다시는 출근이란 걸 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도저히 다시는 못할 것 같다며 10년을 넘게 회사를 다니는 나를 보고 대단하다던 친구들. 친구들이 얘기하던 '도저히 다시는 못할 것 같다'는 기분이 이제 뭔지 알 것만 같다. 이렇게 몸이 편안한 상태에 적응해 버린 내가 1년 뒤 회사 복귀를 망설이게 될 것 같은 불안함.
이쯤 되니 '내가 일을 왜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다다른다.
전 호주 총리 줄리아 길러드(Julia Gillard)는 일이 우리의 삶에 방향과 목적을 부여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런 거창한 이유까진 모르겠다.
그저 돈을 벌어야 해서? 그렇다 돈도 필요하다. 하지만 내 월급이 없다고 길바닥에 나앉진 않으니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일이 좋아서? 글쎄... 일이 즐거웠던 적이 분명 있다. 원하는 성과가 나왔을 때의 성취감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힘들고 짜증 났던 적이 더 많다. 하루 9시간을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창살 없는 감옥에 앉아있는 것 같아 숨이 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아실현을 위해? 내가 여전히 사회에서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 인정받는 건 의미가 있다. 또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누구 엄마가 아닌 내 이름과 특정한 직책으로 불리는 건 나의 존재를 매일 확인받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원대한 목표 실현을 위해? 난 회사 임원이 되겠다던가 이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해 사업체를 차려야겠다던가 하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공공분야에서 일해온 덕에 항상 개인의 입신양명이 아닌 조금 더 큰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면 의욕이 생겼었다.
그러니 이 중에서 굳이 꼽자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내 인생 피크를 달리고 있는 연봉과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기회가 일을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벌고 자아실현을 하면 금상첨화지만 세상이 본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다면 누군들 성공하지 못했으랴.
그리고 난 극도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니 100% 내가 좋아하는 일에 올인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다. 다시 피아노를 친다던가 글을 써보겠다는 무모한 도전은 내 옵션에 없으니 그저 30% 정도만 충족시켜 주면 된다. 내가 감옥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만. 그렇게 되면 집에 들어앉고 싶은 마음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다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일이 하고 싶다 해도 가까운 미래엔 일자리를 로봇들에게 빼앗겨 기본소득에 의지하며 살아야 될지도 모를 일이다. 철학박사이자 작가인 팀 던럽은 그의 책 [노동 없는 미래]에서 "일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고 유용한 부의 재분배 방식이 아니다. 이제 일은 최저 생활 임금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몸부림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처절해져가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나같이 일에 있어서 자아실현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는 사람에게 그의 말처럼 일이 그저 생활비 확보를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말은 굉장히 암울한 미래다.
그렇다면 그 어두운 미래에도 계속 일을 하며 살아가려면 결국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그나마 인생이 조금 덜 우울하겠구나 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그리고 알다시피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그 반대급부로 포기해야 할 것들이 생긴다. 직업의 안정성과 내 연차에 걸맞은 연봉.
팀 던럽이 옹호하는 기본소득제로 생계가 유지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런 거 저런 거 재지 않고 정말 좋아하는 일에 뛰어들 수 있을 텐데...
그런 날이 올 때를 대비해서 나와 한번 진지하게 얘기 봐야겠다. 랜덤으로 닥쳐오는 기회들에 불나방처럼 덤벼들지 말고 네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고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면 손에 쥔 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있는지 너 자신을 돌아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