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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ak Oct 22. 2020

죽음의 자의적 선택

: 감정의 찌끄레기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와 같다. 

우리는 성공을 향해 가거나 행복을 향해 가거나 정의를 향해 가는 기로에서 어느 것이든 선택을 해야 한다. 

세 개의 갈래로 나눠진 길일 수도 있고 때론 하나로 포개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그 위를 내딛는 걸음걸음에 우리는 고뇌하고 절망하고 울고 때론 웃는다.


누군가는 먼저 웃는다. 웃고 웃다 절망한다.

누군가는 먼저 운다. 울고 울다 희망을 조우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다시 울고 다시 웃는다. 


삶에 끝이 있다면 사고가 정지된 그때일 것이다.

사고의 정지는 육체적 쇠퇴로 인한 물리적 정지와

정신적 소진으로 인한 추상적 정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혹자가 어떠한 절망에 갖혀 헤어나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울다 지쳐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소진한다면 정신적, 추상적 사고의 정지를 겪을 것이고

이건 모든 육체적 기능의 정지와도 같은 것이다.

아직 육신에 숨이 붙어 있다고 죽어가는 정신을 두고 멀쩡히 살아 있다고 멋대로 치부할 수 없다.


계속 기능하는 육체로 인해 죽어가는 정신은 회생의 기회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중환자와 다름없다. 

어려운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 과정을 견뎌야 하며 재활의 의지를 발견해야 한다.

때론 정신적 식물인간으로 오래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육체적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하기 위해 안락사라는 개념이 생겨났다면

정신적 병자의 고통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때로 신체적 병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건강한 정신적 병자는 

타인이 헤아릴 수 없는 자기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삶의 영위권은 본인에게 있다. 

주어진 목숨까지 살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지라면

삶을 여기에서 멈추고자 하는 것도 또 다른 삶의 의지일 것이다. 

그 누구도 자기 삶의 영위권을 행사한 이에게 비난을 겨눌 수 없다. 

적어도 그가 되어 그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상은 자살에 대한 사회적 통념만으로

그의 선택과 그의 삶을 가볍게 또는 어리석게 또는 명백한 잘못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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