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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ak Oct 25. 2020

오랜 머리를 자른다는 것

: 감정의 찌끄레기

미련스럽게 두었다. 

나이를 하나 둘 먹어갈수록 긴 머리를 할 기회가 적을 것 같아서였는데

그렇다고 해도 너무 미련스럽게 내버려 두었다.


사실 머리를 이토록 길러 본 건 처음이었다.

짧은 머리가 어울리는 편이기도 하고

한 가지 모습에 쉽게 질리는 타입이라

짧았던 머리가 어깨를 넘으면 머지 않아 다시 귀를 드러내게 머리를 잘랐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하나 둘 자연스레 버리고 잊을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나눈 우리의 이야기

우리가 거닐던 그곳의 공기

네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의 감각

모든 것에서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네 생각

변함없이 너에게 안부를 물으려는 내 손가락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면

그것들은 이 우주 안에서 소멸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조금 섭섭했다.

아니, 많이.


내가 의식하지 않지만 너의 흔적이 어딘가에는 남아있기를 바랐고

아마 그게 너와 함께 했던 나의 머리카락이었던 거 같다.

매우 고전적이게도.


그래, 이게 내가 머리를 계속 기르던 진짜 이유였다.


이미 어깨를 넘어섰던 당시부터 줄곧 기르다 보니

어느새 허리에 닿았다.

성인이 된 후에 이렇게 긴 머리는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그 사이 머리를 자르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일종의 미련처럼.


2년쯤 지나서야

내가 좋아하는 길이로 자를 수 있었다.

새로운 나를 찾고 싶었고 본연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머리가 잘려나가는 것을 보고 슬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슬펐다. 섭섭했다. 그리고 아쉬웠다.

무엇에 대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짧아진 머리만큼 내가 찾고 싶었던 나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나의 모습.

머리에 우겨넣은 의미를 버리고 나니 긴 머리에 가려진 내가 드러났다. 


내 눈 앞에 나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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