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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Feb 25. 2023

신경림의 『罷場 파장』 53년 후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한 줄만...

창작과 비평사에서 신경림의 시집 『農舞』가  출판된 지 올해로 50년이 되었고, 내가 이 시집을 산 건 1997년이었으니 26년이 되었다. 서점에서 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책을 선택할 때도 비주얼에 참 약한 편이라 순전히 강렬한 표지에 마음이 빼앗겨서라고 떡 하니 써놓았다. 얇은 시집이지만 처음에 한 번은 읽은 것 같은데 그 후로 정독을 한 적이 없어 잊고 있었다. 


그런데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란 제목으로 2009년 출판된 에세이집 표지를 각종 커뮤니티에서 일종의 밈처럼 가져다 쓰는 이미지가 『農舞』에 실렸던 시 한 구절이라는 걸 발견했다. 시의 제목은 1970년 발표한 罷場 파장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몇 줄 되지 않지만 시를 읽으면 가난한 시절 하릴없는 여름날의 풍경이 눈앞에 떠올라 서글프고 울적하다. 신경림 시인은 1936년생, 내 아버지와 동갑이다. 가난한 시절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이기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덜렁 첫 줄을 따온 표지 이미지가 너무 유명해져서 젊은 세대에게는 뭔가 놀리는 느낌으로 쓰이게 된 걸 시인은 알고 있을까. 


세월이란 무서운 것이다. 시인은 산업화, 도시화가 한창 진행되던 1960~1970년대 점점 퇴락해 가는 농촌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반백년이란 시간이 흐르니 젊은 세대에게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 한 줄만 살아남아 기묘하게 쓰이고 있다. 그래도 50년을 뛰어넘어 이 한 줄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걸 기뻐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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