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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Nov 24. 2022

베네치아에서 만나요

독수리 타법과 베네치아 게임

노트북을 펼쳐 좋아하는 책 구절을 타이핑하다가 문득 타자를 처음 접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독수리 타법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타이핑을 하기 시작한 첫 세대가 X세대일 것이다. 컴퓨터를 통해 타이핑을 배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타자기로 타이핑을 배우는 건 꽤나 번거롭고 오래 걸리는 일이어서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타자를 익히기 위해서 학원을 다녔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수동 타자기로 틱틱 탁탁 타이핑을 해서 문서 하나 완성하는 일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요즘은 어떻게 타이핑을 익히는지 모르겠지만 90년대는 한메타자교사가 일등공신이었고, 내 경우에도 독학으로 한타와 영타 500타까지 도달할 수 있게 해 준 게 한메타자교사였다. 어느 정도 타이핑이 익숙해지면 연습게임으로 하는 베네치아가 은근 스릴만점이었는데 타이핑으로 바다에 떨어지기 전 글자 바이러스 군단을 물리쳐서 벽돌을 사수하여 베네치아를 지켜내는 방식이었다. 2020년 코로나19 유행에 직격탄을 맞은 유럽, 특히 이탈리아 북부에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잊혔던 베네치아 게임의 인트로 해설 장면이 30년 뒤를 예측한 게 아니냐면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단순한 타자게임에 불과했지만 베네치아 게임을 하면서 언젠가 베네치아를 꼭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가졌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 마르코 광장에서 인증샷도 찍어보고, 곤돌라에서 뱃사공의 노래도 들어보는 상상은 10년도 채 되지 않아 현실이 될 기회가 왔었다. 2004년 다니던 직장이 사업을 접는다는 소식을 들었고, 8년 동안 변변한 휴가 한번 가지 못했었기에 이 기회에 배낭여행을 길게 가보기로 한 것이다. 2004년 겨울에 출발해서 2005년 여름에 돌아온 6개월 배낭여행 중 이탈리아에 갈 기회가 생겼고, 당연히 베네치아를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기 배낭여행의 단점이랄까, 여행이 길어지면서 효율적인 일정을 중시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베네치아를 지나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하긴 했는데 관광을 하기에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당시 오며 가며 만난 배낭여행자들이 전하는 베네치아 숙소 사정은 매우 열악하니 그냥 관광만 하고 떠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도착한 시간은 늦은 오후라 일단 숙소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관광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 길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라 산타루치아 역에서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에 안녕을 고하는 두고두고 후회할 결정을 하고 말았다. 그때 같아서는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유럽 여행을 다시 올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베네치아는 다음을 기약하는 카드로 남겨둔 것인데 17년이 되도록 베네치아를 다시 갈 일은 없었다. 2010년에 루마니아, 폴란드 여행을 간 적이 있지만 설 연휴를 이용한 휴가라 다른 도시까지 갈 여력이 없었고, 다시 여행을 꿈꾸었을 즈음에는 코로나라는 변수가 터지고 말았다. 

이탈리아에서 3주를 머무는 동안 피렌체, 밀라노, 베로나, 로마에서 너무나 멋진 시간을 보내서 베네치아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여행은 지극히 개인의 취향이라 이탈리아에 대한 감상도 제각각이지만 나는 이탈리아가 너무 좋았기에 베네치아를 놓친 아쉬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기후위기로 베네치아의 침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초조한 마음이다. 이제 코로나도 엔데믹 시기에 접어든 것 같으니 다시 여행을 꿈꿔볼 시기가 온 것 같다. 멀지 않은 미래에 베네치아의 날개 달린 사자를 만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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