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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Nov 25. 2022

그때 그 사람

90년대 배우 한석규가 그립다.

80년대 안성기와 박중훈의 뒤를 잇는 90년대를 떠올리는 배우로는 한석규를 꼽을 수 있겠다. 영화배우라고 하기엔 심심하고 튀지 않는 외모의 한석규였지만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바꾼 그만의 무기는 따뜻하고 편안한 중저음의 타고난 목소리와 성우 활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발성과 정확한 발음, 무엇보다 선량함과 악랄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얼굴과 설명이 필요 없는 연기력이었다. 


성우 한석규가 대중에게 처음 존재감을 알린 건 MBC 드라마 <아들과 딸. 1993>의 ‘후남’의 자상한 남편 ‘석호’ 역일 것이다. 그때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배우가 무려 주인공 김희애의 키다리 아저씨 같은 남편이라니… 그런데 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배우는 귀한 아들 ‘귀남’의 운을 잡아먹는다고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살았던 ‘후남’이 당당한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원하는 조력자 역할을 너무 훌륭하게 연기한 나머지 극 중에서 크지 않은 비중이었지만 대중에게 ‘한석규’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다. 

<서울의 달. 1994>에서는 뻔뻔하고 유들유들해 보이지만 모성본능을 자극하며 내면의 상처를 슬쩍슬쩍 보여주며 영숙(채시라 분)의 애를 태우는 제비족 홍식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부동의 스타로 자리매김한다. 그 후 한석규는 스크린으로 활동영역을 옮겨 <닥터봉. 1995>, <은행나무침대. 1996>를 연이어 히트시켰고, 

1997년 한 해에만 <초록 물고기>, <넘버 3>, <접속>이 차례로 개봉해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며 한석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쉬리. 1999>, <텔 미 썸딩. 1999>까지 대박행진을 이어갔지만 하는 영화마다 너무 잘되었던 게 부담이 되었을까. 

그는 차기작 선택에 신중을 기하다가 3년 동안 공백기를 갖게 되었고, 그 사이 한국 영화 관객들의 찬사는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라는 새로운 스타들의 몫이 되어 버렸다. 배우를 칭찬할 때 ‘대체 불가’라는 표현을 즐겨 쓰지만 나는 그 ‘대체 불가’를 믿지 않는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당위성을 가져야 하는 거니까. 90년대 후반 한석규의 필모그래피라면 지금은 훨씬 훌륭한 커리어를 이어갔어야 마땅하지만 그 3년의 공백 동안 한석규의 커리어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기에 그 공백기가 너무도 안타깝다. 그때 한두 작품만 했어도 한석규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회는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 기회조차도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니 정말 제한된 몇 번의 기회가 살금살금 찾아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 그것이 기회라는 걸 알아채는 것도 쉽지 않아서 지나고 나면 다시없을 소중한 기회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후회하기 일쑤다. 그의 인생작을 많이 보고 싶은 관객으로서 아쉬움이 남긴 해도 배우 한석규는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나처럼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시도 자체를 많이 하는 것이다. 망설이는 순간 기회라는 놈은 저만치 내빼버리니까. 머릿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만리장성을 쌓아봐야 내 머릿속 생각을 알아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미약한 아이디어라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만들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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