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sary Apr 05. 2023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찰나의 순간

태풍 루사 때 바다에 휩쓸린 기억

삶과 죽음이 정말 짧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될 때가 있다.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한순간에 생사가 갈리는 후일담이 나오는 걸 볼 때마다 과연 인명재천(人命在天)이 맞는 말인가 싶다. 5일 오전 성남시 정자교 보행로가 한쪽으로 갑자기 무너져 내려 한 명이 숨지고 한 명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사람이 불과 3~4초 사이에 무너진 다리와 함께 영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10초, 아니 5초 정도만 걸음이 늦었어도 저녁 뉴스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을 텐데 한순간에 갑작스럽게 삶이 끝나버린 것이다.  


사망자는 40세의 젊은 여성…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았을 젊은 나이에 뜻밖에 목숨을 잃었으니 생면부지지만 너무도 슬프고 안타깝다. 예전에는 이런 뉴스를 접할 때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건성으로 지나쳤는데 나 역시 아찔한 경험을 한 이후에는 허투루 넘기게 되지 않는다. 


2002년 8월, 혼자 제주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당시에 제주도를 가면 항상 가는 곳이 있었는데 산방산과 화순 해변이었다. 당시만 해도 화순 해변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히 쉴 수 있어 휴가를 갈 때마다 가는 곳이었다. 그때도 언제나처럼 화순에 숙소를 정했는데 저녁이 되니 비바람이 세차게 불고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마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완전히 정전이 되어버렸다. 


전기가 나가버리니 시간을 보낼 거리가 없어져버려 그냥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잠이 들어서인지 다음날 새벽에 눈이 떠졌다. 밤새 마을을 흔들던 비바람이 조금 잦아들어서 해변으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 동트기 전이라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해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다리에 감기는 바닷물의 감촉을 즐기며 해변을 걷는데 갑자기 엄청난 파도가 밀려오더니 내 몸을 바닷속으로 이끌고 갔다. 


무릎까지 오던 바닷물이 가슴까지 차버리니 너무 놀랐다. 주위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사람 한 명 바다에 빠져 죽어도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운동신경이라고는 없는 나였지만 있는 힘을 다해 육지로 내달려서 겨우 살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당황해서 허우적댔으면 나는 살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기에 충분한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태풍이 올 때 강이나 바다에서 익사사고가 나면 이런 날씨에 물놀이를 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탓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일 이후, 사고는 정말 한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내가 겪어보니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날 그 모진 비바람은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 지붕까지 날렸던 태풍 루사였다. 


돌이켜보면 태풍이 상륙한 해변에 새벽 댓바람부터 나가서 감상에 젖었던 건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 여행이 주는 해방감이 이성적 사고를 멈췄던 것 같다. 이 사건 이후, 여행을 갈 때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는 습관이 생겼고, 여러 번의 배낭여행에도 별다른 사고 없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살다 보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불행을 만날 때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예측 가능한 변수를 힘닿는 대로 통제하는 일밖에 없는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프리지어가 있는 주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