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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Aug 15. 2023

싱가포르에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

어디에도 있었던 조국 독립을 위한 노력

싱가포르에서 생활할 당시, 생각보다 한국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인구 545만 명의 작은 나라 싱가포르에 한국 사람이 2만 명이 넘게 살고 있다는 건 놀랄만한 일이 분명하다. 200개가 넘는 한식당, 수십 개의 한인 마트는 물론, 내가 싱가포르를 떠나올 즈음에는 싱가포르 최대 대형마트 페어 프라이스나 콜드 스토리지에도 한국 식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 한식을 사 먹거나 해 먹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싱가포르에 과연 어떤 한국인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했을까 궁금했다. 한국인이 싱가포르에 오게 된 경위를 알아보니 독립운동을 위해 1913년 중국 만주,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을 하던 홍명희가 1915년 3월 싱가포르로 옮겨 활동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중국 혁명파들이 1914년 창간한 ‘국민일보” 발행소(Duxton Road)에서 홍명희와 동료들은 1917년 2월까지 생활했는데 말레이반도의 고무농장을 구입하여 이곳에서 얻은 수익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창이공항 인근의 포로수용소 터_출처. 독립기념관

싱가포르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 1942년 이후 현재 창이공항 인근 수용소에 모든 전쟁 포로와 민간인 포로를 수용했다. 부산 서면에 있는 노구치 부대에서 2개월간 교육을 마친 포로 감시원 800명이 싱가포르 창이 수용소에 배치되었는데 일본 패전 후 한국인들은 주롱의 수용소에서 대기하다가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전범재판에 회부된 한국인 148명(129명이 포로 감시원) 중 23명이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당시 교수형에 처해진 한인 포로 감시원들은 따로 매장하지 않고 일본군 전범자 135명과 함께 싱가포르 일본인 묘지에 합장되어 있다.

싱가포르 일본인 묘지공원_출처. 독립기념관

싱가포르에서 정착한 한국인은 안중근 의사와 평안남도 진남포 이웃에 살던 정대호 선생(1884~1940)으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 당시 안의사의 가족들을 도피시키고 하얼빈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이다. 정대호 선생은 쑨원의 추천으로 1926년 3월 싱가포르에 오게 되었다. 그는 1930년 경남무역공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1940년 8월 싱가포르에서 별세하였다. 


정대호 선생이 싱가포르 이주할 때 함께 왔던 그의 아들 정원상 선생(1910~2012)이 1963년 싱가포르 한인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싱가포르와 교류가 거의 없었던 우리나라는 1970년 11월이 되어서야 통상대표부가 설치되었고, 1972년 7월 총영사관으로 승격되면서 양국 간의 우호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973년 싱가포르 한국 어린이들을 위한 한글학교를 개교하면서 한인사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지금은 현대적인 도시국가지만,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만 해도 말레이시아 변방 어촌마을에 불가했던 싱가포르에서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의 삶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세대간 혐오와 이념 갈등이 심화되면서 강대국들의 전쟁과 이권다툼으로 어차피 독립은 되었을 거라며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세상에 노력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열강과 세계인들이 우리나라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아니 존재를 알고나 있었을까? 사람들을 도발하기 위해, 또는 남들과 달라 보이기 위해 누구보다 뜨겁게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조롱하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행태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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