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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Oct 12. 2023

‘내로남불’ 사이의 거리

재주를 악업을 쌓는 데 사용하면 업보로 돌아온다

‘내로남불’은 다양한 상황에서 써먹기 좋은 단어다. 1996년 6월 12일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박희태의원이 의사진행발언으로 “자기가 부동산을 사면 투자요, 남이 사면 투기이며, 자기 여자관계는 로맨스고, 남의 여자관계는 스캔들이라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라고 한 것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1980년대부터 시중에 떠도는 농담으로 여기저기 인용해 등장한 바 있다. “내가 하는 연애는 로맨스이고, 남이 하는 연애는 스캔들”이 그것인데 “내로남스”보다는 불륜(不倫)을 가져와서 한글, 영어, 한문이 결합된 기상천외한 “내로남불”로 굳혀진 듯하다. 


비슷한 표현으로 역시 직설적이었던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 같은 속담이나 ‘남의 눈의 티끌은 보고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 같은 성경 문구는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고 ‘내로남불’이라는 마법의 한 단어로 통합된 것이 못내 아쉽다. 마치 ‘매우 좋다’, ‘굉장히 훌륭하다’, ‘너무 마음에 든다’ 등이 ‘대박!’ 한 단어로 통합된 것처럼 다양한 표현이 사라지고 단 한 가지 단어만 통용되는 것이 단조롭기만 하다. 


‘내로남불’이 널리 쓰이는 이유는 자신에게 너그럽고 타인에게 박한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여서일 것이다. 많이 배우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어도 ‘내로남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수없이 보고 또 보아왔다. 겉으로는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지만, 내 자식은 그들만의 리그끼리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모든 성취는 똑똑한 자기 자식 스스로 이뤄낸 것인 양 과시하다가 부정한 과정이 적발되자 이 정도는 관행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세상 모든 불의를 단죄하겠다며 여기저기 칼을 휘두르다가 스스로 범한 잘못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자 과도한 공격을 멈춰달라고 호소한다. 내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건 괜찮지만 남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건 참을 수 없어한다.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나와 남에게 같은 잣대를 드리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최소한 그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은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찔려서 피 흘릴만한 칼이라면 다른 사람이 찔려도 똑같이 피 흘릴 만큼 아프다. 어설픈 정의감과 공명심으로 사방에 칼을 휘둘렀다면 그 칼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향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아프면 남도 똑같이 아프기 마련이라는 것, 남을 공격하고 비난하기 전에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본다면 자신이 감당할 책임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주먹으로 흥한 자 주먹으로 망하고, 펜으로 일어선 자 펜으로 망하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주를 선의로 사용하지 않고, 악업을 쌓는데 쓴다면 반드시 그 재주는 피할 수 없는 업보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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