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부터 드라마 보는 취향이 확 바뀌었다. 예전에는 삶에 대한 통찰과 희로애락이 담긴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고 즐겨봤지만 이제는 그런 드라마들을 보는 게 꺼려져서 피하고 있다. 훌륭한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았던 <나의 아저씨. 2018>, <눈이 부시게. 2019>, <우리들의 블루스. 2022>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게 두려워서 드라마 채널에서 재방을 무수히 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피해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그런 장르의 드라마를 그냥 순수하게 픽션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 생활이 밝고 명랑해서 드라마를 드라마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부모님은 건강하고, 가족들 모두 평탄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면서 살았기에 드라마의 가슴 아픈 설정을 그냥 드라마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에게 병마가 드리워지고, 우리 남매는 간병을 하고,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는 드라마를 보기가 두려웠다.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오래전 <전원일기>에서 김수미 씨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노인으로 분장하고 일용 엄니를 말 그대로 연기했다. 대놓고 픽션인 걸 누구나 알 수 있어서 드라마에서 아무리 서글픈 내용이 전개되더라도 현실과 괴리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속 노인 캐릭터는 진짜 노인 배우가 등장해서 노쇠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의 아저씨>에서 손녀에게 의지해서 살고 있는 봉애(손숙 분),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아들과 등지고 사는 옥동(김혜자 분) 등은 노인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노인 배우들이 등장해서 보여주는 노년의 서러움과 슬픔을 마주하는 것이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하다. 고령의 부모가 병들고 사별하는 내용의 드라마는 차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직접 겪고 있는 일들이 힘겨운데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삶의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지 않았고, 연기자들이 아무리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해도 예전처럼 마음에 전해지지 않고 겉돌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겪었던 슬픔의 시간이 고되고 힘들어서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로 온전히 비극을 즐길 수 없게 된 처지가 되었다.
반면,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허무맹랑한 내용의 드라마들을 즐겨보게 되었다. 현실과 접점이 없는 타임슬립물이라든가, 유치한 판타지물 같은 드라마들을 아무 생각 없이 보는 편이 잠시라도 현실에서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저런 뻔한 드라마를 누가 보나 싶었던 일일 드라마나 주말 연속극 등을 즐겨보는 중장년 시청층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그들만의 사정을 알 수 없다. 예전의 나라면 손발이 오그라져서 볼 수 없었을 <유미의 세포들. 2021> 같은 드라마의 다음 시즌을 지금은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밝고 유쾌한 에너지가 뿜뿜 솟는 드라마를 보는 순간만은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듯 하니까...
*메인 이미지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