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과 복수에 대한 대서사극 <벤허>
인생을 살면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순간이 있었던가 돌이켜보니 소소한 해프닝을 제외하고는 기억에 남는 낭패를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 같았던 친구나 동료가 자기가 살기 위해 나를 내동댕이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막다른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나를 버리는 경우라면 그래도 그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처음부터 이용했음을 알게 되면 그의 악행에 치가 떨리기보다 내가 얼마나 허술하고 멍청해 보였는가 싶은 자괴감 때문에 더 괴로울 때가 있다.
상황에 따라서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분명 말 못 할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같은 변명거리를 억지로 생각해 내는 건, 여전히 그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만만하게 보인 나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자그마한 빌미라도 찾고 싶어서가 아닐까. 배신의 쓴맛을 보고 애써 잊어버리자고 생각해도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천불이 올라와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데, 대체 나를 뭘로 보고… 같은 생각 말이다.
특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면 그 충격과 여파가 꽤 오래간다. 영화 <벤허. 1959>에서 예루살렘 최고의 유태 귀족 벤허는 어린 시절 죽마고우였던 멧살라에 의해 가족 전체가 파탄 나고 뿔뿔이 헤어지는 수난을 겪는다. 벤허 가문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고, 어머니와 동생은 감옥에 보내지고, 벤허는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벤허는 끌려가면서 멧살라에게 “넌 내 친구잖아, 도와줘!”라고 외치지만 이제 멧살라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원수일뿐이다.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노예생활을 하던 벤허는 우연히 집정관 아리우스의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의 양자가 되어 다시 예전의 부귀영화를 되찾을 기회가 생긴다. “증오는 삶의 원동력”이라는 아리우스의 말처럼 벤허는 멧살라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심기일전한다. 나를 비참한 처지에 몰아넣은 상대가 감히 대적조차 할 수 없도록 보란 듯이 크게 성공하고 싶은 강한 동기부여가 될 때도 있다. 저 사람에게만은 누가 승자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해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게 된다면 배신 당한 아픔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기분 더러운 배신을 당했다고 상대를 원망하고 주저앉아 있어 봐야 상대에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배신당해 마땅한 형편없는 사람에 머물 뿐이다. 배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가 만만히 봤던 모습이 완전히 틀렸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그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진짜 나의 모습을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