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싶은 사람
2021년 가을, tvN에서 신민아, 김선호 주연의 <갯마을 차차차> 첫회를 보는데 매우 익숙한 이야기길래 기억을 더듬어보니 오래전 봤던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2004>이 떠올랐다. 섬마을에 치과를 개업한 혜진(엄정화 분) 앞에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두식(김주혁 분)의 툭닥거리는 커플 연기가 유쾌했던 영화 <홍반장>의 리메이크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원작이 워낙 탄탄한 데다가 신민아, 김선호도 코믹 연기를 잘 해내서 드라마는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완결되었지만 보는 내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배우 김주혁이 자꾸 떠올라서 웃기는 장면에서도 마음 한쪽이 먹먹한 기분으로 볼 때가 많았다. 김주혁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년이나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배우 김주혁을 처음 본 건 아마 SBS 일요 드라마 <카이스트. 1999~2000>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은주, 채림, 이민우, 김정현 등이 주연급이었다면 김주혁은 그들의 선배 역할이어서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공대 선배 느낌 물씬 나는 이미지라서 볼 때마다 참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 후 배우 김무생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고, 참 아버지랑 닮지 않은 아들이다 싶었다.
내가 기억하는 중년 이후의 김무생은 선 굵은 외모와 낮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고, 주로 엄격하고 무서운 캐릭터를 연기한 작품이 기억에 남는데 반해 김주혁은 부드럽고 자상한 외모에 걸맞게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 장르에 잘 어울렸던 배우였다. 2000년대 초반 영화 제작발표회나 시사회 현장에서 봤을 때는 거의 신인 시절이어서인지 아직은 배우답지 않게 쑥스러워하는 모습이었던 기억이 있다.
<세이 예스. 2001>, <YMCA 야구단. 2002> 시사회에서는 카메라를 영 어색해했지만 <싱글즈. 2003>, <홍반장. 2004> 시사회에서는 여유가 생겨서인지 웃음도 많아졌고 말솜씨도 눈에 띄게 좋아졌던 것 같다. <싱글즈>와 <청연. 2005> 두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 장진영 역시 2009년 37살의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김주혁도 2017년 10월 30일 부정맥에 의한 쇼크 후 교통사고로 45살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0대의 김주혁은 <광식이 동생 광태. 2005>, <사랑 따윈 필요 없어. 2006>, <아내가 결혼했다. 2008> 등에서 자상하고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의 전형을 연기하며 한국의 휴 그랜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7년 동안 짝사랑한 후배에게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며 “세월이 가면”을 부르는 모습은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40대에 접어들어서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하고,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에서 든든한 맏형 이미지로 사랑받던 그는 2017년 영화 <공조> <석조주택 살인 사건><독전> 드라마 <아르곤> 등에서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날카롭고 센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배우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멜로 장인에서 다양한 장르물의 개성 있는 캐릭터로 진화를 거듭하려는 길목에서 갑자기 멈춰서 더 이상 그의 연기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속상하고 안타깝다.
*메인 이미지 영화 <석조주택 살인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