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같은 그림 그리기
다음주가 겨울의 시작이라는 입동인데 오늘 낮기온이 서울 25.9도, 강릉 29.1도, 경남 김해는 30.7도까지 오르는 이상고온을 기록했다. 기상청 관측자료를 보면 2011년 11월 5일 서울 최고기온 25.9도 이후 12년 만에 가장 더운 11월 기록이었다. 낮에 잠시 외출하러 나갔는데 거리에 반소매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고, 카페에 들어갔더니 에어컨을 가동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구 온난화가 걱정스러웠겠지만 본격적인 겨울에 앞서 따뜻한 하루를 선물 받은 것 같아서 따사로운 햇빛과 바람을 만끽하며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내일부터는 전국에 흐려지고 비가 온 후 기온이 떨어진다고 하니 선물 같은 하루는 오늘 뿐인가 보다. 조금 무거워진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들렀는데 디지털 피아노를 치고 있던 사장님 모습이 새로워 보였다.
손님 없는 시간 짬을 내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면서 쑥스러워하시길래 어떻게 피아노 배우실 생각을 하셨냐고 여쭤봤더니 단골손님 중에 피아노 선생님이 계신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후에 잠깐 짬을 내서 가르쳐주시겠다고 제안해서 배우기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달에 따님 결혼식 때 노래 한곡을 연습해서 연주하시기까지 하셨다니 노력과 열정이 대단하신 것 같다.
나름대로 연습을 열심히 하셨는데 막상 실전에서 여러 하객들 앞에서 연주를 하려니 눈앞이 캄캄해지시더라면서 그래도 딸 결혼식에서 엄마가 축하곡을 쳐줄 수 있어서 기뻤다면서 웃으셨다. 지루한 일상에 피아노를 배우고 연습하면서 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 크게 공감이 되었다.
몇 년 전에 그림 그리기를 잠깐 배운 적이 있었는데 생각을 비우고 온전히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꽤 즐거운 휴식이 되었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는데 막상 그림을 그려보니 잘 그리지는 못해도 자꾸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누굴 보라고 그리는 게 아니고 그저 나 혼자 즐기기 위한 그림이라 못 그려도 상관없고, 공들여서 스케치하고 색칠하는 게 아니라 작은 드로잉북에 색연필이나 사인펜으로 손이 가는 대로 쓱싹쓱싹 그리는 거라 부담이 없어서 더 좋았다. 한동안 불면증으로 고생할 때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붉게 물든 단풍나무라도 그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