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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Nov 03. 2023

낙엽 지는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

풍경뿐 아니라 사람도 살피는 가을, 그리고 겨울

연이틀 계절을 잊은 더운 날씨에 미뤄뒀던 집안일을 좀 하고 나서 장 보러 길을 나섰다. 보통 자전거를 이용하는 편이지만 하늘이 잔뜩 찌푸려서 비가 금세 쏟아질 것 같아서 버스를 타고 나갔다. 초스피드로 장을 보고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더니 도착예정시간이 한참 남아서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1.6km 거리라서 자전거도 타지만 걸어 다니는 경우도 꽤 있었다. 더구나 우리 동네 주택가는 나무와 꽃이 많아서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어 봄, 가을에는 많이 걷곤 한다.


자전거를 탈 때는 쌩쌩 지나가기 때문에 거리 풍경을 찬찬히 보기는 어려웠는데 오랜만에 걸어보니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낙엽이 가득 쌓인 길을 걷는 발걸음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나는 게 듣기 좋았고, 빨간 단풍잎도 예쁘지만 샛노란 은행잎이 주단처럼 깔려있는 길은 정말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참 가을을 만끽하면서 걷다가 신호등 앞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괜스레 마음이 찡해지는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거리에 가득 쌓인 낙엽을 쓸어 마대자루에 담고 있는 분을 본 것이다.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끝없이 이어진 낙엽을 쓸고 또 쓸어 담는 모습을 보니 좀 전까지 내가 가진 한가로운 감상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1월에 어울리지 않게 더운 날씨에 연신 땀을 닦아내며 바쁘게 오가는 차도 한가운데서 낙엽을 치우는 걸 보니 세상이 별일 없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참 여러 사람의 고된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군부대에 눈이 오면 눈 내리는 풍경이 낭만적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제설작업을 할 생각에 군인들에게 눈이란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낙엽을 치우는 분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시겠구나 싶었다. 그나마 눈은 녹기라도 하지, 낙엽은 쓸어도 쓸어도 나무들은 끝이 없이 잎을 떨구고, 부피까지 엄청나니 치우는 난이도 면에서는 눈보다 힘들 수도 있을 듯하다.


벚꽃 잎이 흐드러진 봄날, 비 오는 여름날, 낙엽 지는 가을, 눈 내리는 겨울이 누군가에게는 고단한 노동이 따를 수 있다는 걸 생각하니 이 나이가 되도록 철도 없고, 속도 없이 풍경만 즐기면서 살아온 내 삶이 얼마나 안락했는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이제 비가 내리고 나면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하는데 추운 날씨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손길이 필요할지… 풍경뿐 아니라 그 속의 사람도 살피는 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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