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1387』
고전 영문학을 논할 때 가장 상석에 올리는 책은 제프리 초서(1343?~1400)의 『캔터베리 이야기. 1387』다. 고려시대 우왕이 요동을 점령하니마니 할 때가 바로 1387년이다. 이 얼마나 고색창연한 시대인가. 『캔터베리 이야기』라는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읽어볼 생각조차 없었던 이 책을 찾아 읽게 된 것은 루시 워슬리의 『하우스 스캔들』을 읽다가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해서 무려 다섯 명의 남편을 갈아치운 여장부에 관한 에피소드가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온다는 대목을 접하고 호기심이 발동해서였다.
영어로 인쇄된 최초의 이야기책으로 역사에 기록된 『캔터베리 이야기』 는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술술 읽히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었다. 친절하다 못해 과한 설명이 가득한 수다스러운 초서의 문장을 따라가다가 웃음이 빵빵 터지고, 눈물도 찔끔 나오는 스스로에 깜짝 놀랄 정도로 6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이야기꾼의 위력을 실감할만 하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캔터베리 대성당을 찾아온 31명의 각계각층의 순례자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엮은 민담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페스트를 피해 모인 남녀 10명이 이야기를 나누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1349』이 떠오르는 구성이다.
생각보다 현대적이고, 꾸밈없는 문장과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가 어느 날 문득 중년이 되어버린 자신과 마주하며 겪는 공허함을 위로하는 문장을 발견하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세상의 변화무쌍함, 몇 번의 희로애락이 번갈아 찾아오는 세상사를 겪으며 깨닫는 인생무상에 대해 일갈하는 대목은 짧지만 인생에 대한 통찰과 대범함이 느껴진다.
“어떤 신분의 사람이라도 이 지구상에서 산 적이 없는 사람이 죽은 일이 없듯이, 이 세상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산 사람으로서 어느 때고 죽지 않은 예를 찾을 수는 없다. 이 세상이란 슬픔으로 가득 찬 거리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순례자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세상의 모든 비애 위에 막을 내려 준다.”
어떤 미사여구나 현학적인 표현을 써서 돌려 말하지 않고, 핵심을 꿰뚫으면서도 직설적이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는 문장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시콜콜한 영어 단어의 어원이 등장하는 것으로 영어 네이티브들이 초서에게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위선과 속물적인 본질을 시원하게 쏟아내는 이야기 자체의 매력만으로도 『캔터베리 이야기』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