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소리조차 아름다운 숲으로 떠나요.
극한 더위와 극한 호우가 반복되는 여름에 지쳐가는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짧은 여름휴가 일정이 나왔지만 집콕이나 해야지 싶었다. 어딜 가봐야 이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고, 어차피 에어컨과 보낼 바에야 그냥 집에서 쉬고 말지 가긴 어딜 가로 결론이 굳어질 무렵 8월 둘째 주가 시작되면서 더위가 주춤해지자 기분전환을 위해 가까운 곳에라도 다녀와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어딜 가면 조용히 잘 쉬다 올 수 있을까 검색을 하다가 “평창”이 눈에 들어왔다. 전국이 폭염으로 아우성일 때에도 대관령은 시원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는데 마침 평창 근처 괜찮은 숙소가 괜찮은 가격으로 예약할 수 있음을 확인한 후 일요일, 월요일 2박을 예약했다. 자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함에도 게으름을 피우면서 당일 기차역에서 승차권을 살 생각이었는데 금요일 저녁에 코레일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일요일 낮시간 기차는 전부 매진된 상황을 확인하고 나서야 저녁 6시 5분 출발 승차권을 간신히 예매했다.
저녁 7시 18분 진부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20여 분 만에 숙소에 도착해 편의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사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주변이 어두워서 바깥 풍경은 확인을 못했는데 새벽에 눈떠서 창을 열고 밖을 바라보니 울창한 푸른 숲이 펼쳐졌다. 바닷가 호텔에서 오션뷰보다 훨씬 저렴한 방에 명명된 포레스트뷰가 사실은 이런 방을 말하는 거구나 싶을 만큼 감탄이 절로 나오는 방이었다.
고작 이틀인데 번거롭게 괜히 왔나 했던 생각이 쏙 들어갈 만큼 만족스러운 풍경이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출근과 더위 때문에 거르고 있던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혹시 몰라서 챙겨 온 트레이닝복을 갈아입고 방문을 나섰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1~2km 라도 뛰고 싶었다. 내가 사는 곳의 찜통더위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맑은 공기와 선선한 바람에 기온을 확인하니 22도였다. 이럴 수가…
작은 개천을 지나고 보니 호숫가 숲길이 나타났다. 그냥 이렇게 달리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날아가고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데 오리 몇 마리가 무리 지어 빙빙 돌며 노는 모습이 보였다. 먹이도 잡고, 부르르 깃털도 털고, 정다운 애정행각(?)을 나누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붉은 봉숭아꽃을 보니 문득 오래전 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여주시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 여름에 할머니댁에 가면 꼭 봉숭아물을 들여주시곤 했는데 손톱 끝에서 봉숭아물이 사라지는 게 너무 아쉬울 만큼 그 여운을 즐겼다. 봉숭아꽃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할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여름날의 추억 한 페이지가 생긴 기분이라 뿌듯하기까지하다. 방구석 휴가였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아련한 감정이라 역시 집을 떠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기분 탓인지 몰라도 도심에서는 매미 소리도 극성스럽고 시끄럽기만 한데 숲 속의 매미 소리는 느긋하고 정취가 느껴진다. 더위와 귀차니즘 때문에 이번 휴가는 포기한 당신이라면 일단 어디라도 떠나길 권하고 싶다. 2025년 여름은 단 한번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