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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ry Jan 09. 2023

재난, 모든 것이 사라진다

간발의 차이로 비껴간 재난에 대한 기억

요 며칠 동안 밤에 잠을 못 자고, 자다가도 금방 깨고 수면품질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난밤 맘먹고 다른 때보다 이른 시간인 10시 40분경 잠자리에 들었다. 웬일로 뒤척이지 않고 금세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요란한 재난문자 알림 소리에 잠이 깨버렸다. 새벽 1시 30분경이었다. 


모처럼의 꿀잠을 설친 것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천지개벽의 재난이 아닌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잠을 청했으나 홀랑 달아나버린 잠의 신이 돌아오긴 틀려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재난 문자 알림에 짜증 내는 분들도 여럿 계시지만 아직은 재난문자를 받고 가슴 철렁한 정도의 대형재난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마음이 더 크다. 


여행을 즐기는 나는 간발의 차이로 재난을 비껴간 경험이 여러 차례 있다. 생애 첫 배낭여행을 떠난 2004년 겨울, 원래는 한 달 동안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고, 중동으로 넘어가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분실하는 바람에 내 장기 여행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져버렸다. 3일 만에 귀국해서 다시 여권을 만들어서 출발하기까지 몇 주의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동남아시아 여행은 건너뛰고 바로 이스라엘로 향했고 크리스마스를 이스라엘에서 맞이했다. 


당시 누구나 다 하던 싸이월드를 하지 않았으나 장기여행의 무탈함과 안부 보고를 위해 개설한 싸이월드에 나의 안녕을 묻는 메시지가 폭주하는 걸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인도네시아 대형 쓰나미가 강타하여 주변국가까지 초토화되어 3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졌다. 내 친구들은 그즈음이면 내가 동남아시아에 머물 것으로 생각하고 다들 걱정돼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평화롭게 칠면조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 친구들은 뉴스에서 나를 볼까 무서웠다는 후일담을 전해 들었다.

보로부두르의 압도적인 풍경

2010년 여름, 족자카르타 여행을 갔을 때다. 보로부두르는 기대 이상으로 멋진 곳이었지만 여유 있는 일정이어서 시간이 많이 남게 되어 므라피 화산 등반을 가기로 했다. 밤에 출발해서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코스라 숙박비도 하루 아낄 수 있어 이거다 싶어 출발했는데 돌이 많은 우리나라 산과 비교하니 길이 험준하지 않고, 땅바닥이 무른 느낌이어서 올라가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3개월 후 므라피 화산이 대폭발해서 350명이 넘게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내가 산에 갔을 때도 가이드에게 화산 근처에서 사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었더니 화산 마을 사람들은 므라피산의 가벼운 용암 분출과 지진에 대해 대체로 무덤덤하다는 것이었다. 뉴스에서 무섭게 폭발하는 므라피산의 모습을 보니 산에 오르면서 느꼈던 물렁물렁했던 땅의 느낌이 떠올라 뒤늦게 등골이 오싹해졌고, 내가 마주쳤던 담배 농사에 여념이 없는 농부들은 무사히 피신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므라피산 인근 농가에서 담배잎을 말리는 농부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인지 지진 안내 문자가 큰 재난을 알려준 게 아님에 안도하긴 했지만, 예전보다 지진 강도가 세지고 있는 걸 보면 이제 우리나라도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는 아닌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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