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많이 웃었고, 행복했다.
브런치를 일기처럼 이용하면서도 가끔 남의 일기를 볼 때도 있다. 부모님이 내 곁에 계실 때 나는 잘 웃고, 잘 웃기는 편이었는데 두 분이 계시지 않은 지금은 잘 울고, 슬픈 이야기에 대한 공감이 훨씬 큰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브런치에서 만나는 슬픈 이야기에 눈물이 주르륵 쏟아지는 경험을 할 때마다 다시는 읽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눈물 쏟아질 게 뻔한 심상치 않은 제목의 글들을 읽고 있다.
60년을 해로한 부부가 같은 날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를 읽고 눈물을 쏙 뺐다. 내 부모님도 금혼식을 넘기셨지만 나는 부모님 금혼식에 특별한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드리지 못한 못난 자식이었다. 아버지께서 가끔 “부모님 금혼식이 참 대단한 건데 나는 그걸 못 챙겨드렸네. 그게 참 후회스러워.” 하셨는데 이제 내가 그 후회스러운 마음을 대물림하고 있다.
불 같은 성격의 엄마와 그런 엄마의 화를 아버지가 누그러뜨리는 게 어린 시절 내가 봤던 부모님 부부싸움의 대부분이었고 엄마가 아버지를 더 많이 좋아하셔서 그런지 크게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똑 부러지고 경우 바른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고, 그런 엄마를 같이 돌봐주셨으면 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1년도 되지 않아 연이어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밭은 기침을 시작하셔서 병원을 찾은 아버지는 입원하시고 3주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3일 전, 병실에서 기력이 쇠한 아버지의 마른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당신 얼마나 믿고 의지했는지 알지? 당신 그거 알고 가야해. 나한테는 당신뿐이었어. 당신 그거 알지?”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하던 엄마 모습을 보면서 내 생각보다 훨씬 엄마가 아버지를 좋아했었음을 알고 조금 놀랐었다. 아버지는 자상하고 큰 소리 내는 법이 없었어도 엄마에게 덤덤한 남편이었다.
엄마와의 이별 준비기간은 1년 남짓이었는데 엄마의 몸상태를 돌이켜보면 정말 나를 위해 견디고 견뎌주셨다고밖에 할 수 없는 1년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돌아가시기 3일 전까지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다니셨다. 엄마는 건강하실 때 임종 순간 자식 힘들게 하면 어떡하냐고 그게 걱정이라는 말씀을 무척 많이 하셨다. 병원에 오래 누워있고 싶지 않다고 그냥 순간에 떠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철없는 나는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될 일이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런데 엄마의 오랜 소망대로 자식에게 1g의 짐도 지워주지 않으시고 온전히 혼자 힘으로 버텨내신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도 없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네 아버지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 정말 고운 사람이었어.”라고 읊조리던 엄마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은 더할 수 없이 선하고 바른 부모님이었다.
부모님은 칠십 대 중반까지 같이 가게를 하셨지만 돈 버는 일에 극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큰돈을 벌지도 못했고, 그저 자식 대학 보내는 정도의 생계를 꾸리는 정도였고 노년에는 자식들이 드리는 생활비에 의지해서 사셨다. 나는 지금까지 풍족하게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의 유쾌하고 고운 심성이 너무 고맙고 좋았다. 사는 동안 우리 가족은 많이 웃었고, 행복했다. 그걸로 이번 생은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