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아였던 20년차 초등교사 '용'
나는 학창 시절 1등가는 문제아였다. 누구도 나를 통제하지 못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교직계 낭만의 시절 1990년대. 선생님들께 수도 없이 뚜드려 맞았다. 하지만 태권도 학원을 꾸준히 다녀서일까? 또래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나는 선생님들의 매질과 주먹질이 아프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도 버틸만 하네?'라는 역효과만 생길 뿐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문제 행동을 멈추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바로잡아 줄 방법을 아는 부모님이 그 방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다.
용이 부모님은 맞벌이셨다. 어머니는 중등교사였고, 나를 출산 후 한 달 만에 복직했다. 아버지도 30대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의 유산을 야금야금 처분하며 사업을 하셨다. 나는 유복하진 않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크게 없는 시간을 보냈다. 유아기에 나는 주로 할머니들 손에 컸다. 외할머니, 버스할머니, 친할머니, 이모할머니.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 되는 할머니들이 돌아가며 봐주신 것 같다. 친척들 말로 (심한)개구쟁이, 말썽쟁이였던 나는 할머니들 손에는 길들여지지 못했다. 나는 심심하면 들개처럼 집 밖을 떠돌았고, 사고도 많이 쳤다. 9살이 되던 해, 나를 돌봐주시던 외가 친척들과 살던 전주에서 멀리 이사를 갔다. 그곳에는 그나마 나를 돌봐줄 친척들도, 할머니들도 없었다.
그때부터 내 삶은 더욱 제멋대로 흘러갔다.
용이가 사고 친 목록을 떠올려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옥상에 모아놓은 연탄재 한 드럼을 다 뿌려놓고, 그 당시 전화번호부를 뒤져 이집 저집, 심지어 다른 나라에도 장난전화를 걸었다. 부모님 돈을 훔쳐 매일 오락실에 가고, 친척 집에서 물건을 훔친 적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거짓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럽다. 나는 그때 내 행동이 얼마나 큰 문제였는지 전혀 몰랐다. 핑계같지만 나를 제대로 혼내고 훈육할 부모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체벌은 흔했다. 선생님들은 한두번 말로 하다가 안 되면 도구나 신체를 이용해 때렸다. 훈계 중에 십중팔구 내가 맞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깐죽거리며 버릇없는 태도가 큰 몫을 했다. 그런데 나는 희한하게 맞아도 아프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에 상처도 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느냐’였으니까. 부모님은 내가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했지만, 훈육을 하지 않으셨다. 용이는 오냐오냐하며 자라온 표본 그 자체이기에 문제 행동은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30대까지는 ‘내 인생에 후회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덧붙이면 '미래에도 지금의 즐거움에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까지 다짐했다.
그런 문제아가 현재는 20년 차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면서 깨닫는다.
‘나의 과거는 왜 후회될 일들만 떠오를까?’
매일 창피하고 부끄럽고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할때도 많다.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보면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때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교사로 살아오며 그리고 삼 남매의 아버지가 되면서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