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 20240508
보볼리 정원에 도착한 나는 표를 사기 위해 줄 섰다. 혼자 서있던 나의 귀에 내 뒤로 서있던 미국인 남녀의 대화가 자연스레 들려온다. 대화만으로는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가 없었으나 남자가 여자보다 연상인 건 확실했다. 여자가 계속 남자에게 앉아있길 권했으나 남자는 이어지는 권유에 결국 짜증을 냈다. 나는 서 있고 싶다고.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 이후에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남자가 성을 보며 말한다.
"디즈니같군."
여자는 네, 하고 그냥 넘기려다가 남자에게 다시 묻는다.
"어떤 점에서?"
"줄 Lines."
맞는 말이었다. 보볼리 정원의 매표소 줄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일요일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저번에 왔을 때는 한적했는데 이번에는 어딜 가도 관광객들이 많았다. 5월은 이탈리아 여행 성수기이기도 했고 게다가 달러 가치가 높은 시기여서 그랬는지 특히 미국인 관광객들이 득시글거렸다.
화창한 날의 보볼리 정원은 어딜 찍어도 아름답다. 남색 티셔츠를 입은 나는 예상보다 뜨거운 날씨에 햇빛을 흠뻑 흡수하며 땀을 줄줄 흘리고 다녀야 했다.
한참 장미가 피어있는 때라 예쁜 꽃만 보면 벌처럼 달려들어 사진을 찍었다. 피렌체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주로 피렌체 두오모 성당과 우피치 미술관, 혹은 다비드상을 보러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갔다가 저녁엔 미켈란젤로 언덕에 갈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라면 나는 보볼리 공원을 추천하고 싶다. 아름다운 석상들과 꽃들이 맞이해주는 넓은 공원을 걷다 보면 이게 바로 여행이지 싶은 것이다.
하지만 보볼리 정원은 무척이나 넓고 이날 땡볕을 맞으며 걸어다닌 나는 엄청나게 지쳐 있었기에, 이제 보볼리 정원은 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보볼리 정원을 뒤로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저녁을 먹기 위해 고른 레스토랑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Acqua al 2. 발사믹 스테이크가 유명한 곳이다. 나는 예전에 먹었던 스테이크 샘플러가 만족스러웠기에 다시 찾았다. 다만 일요일 저녁이었고 예약도 하지 않았던지라 거절당할 각오도 하고 찾았으나 마침 자리가 있어 들여보내주었다. 하지만 손님은 끊임없이 밀려들어오고 나같이 예약도 없이 혼자 온 동양인 손님은 아무래도 주인 아저씨의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인지라 Welcoming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주인 아저씨는 나중엔 누구랑 뭔가 안 맞았는지 계산대에서 성질까지 버럭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과연.
거기에 더해 스테이크 샘플러가 그다지 맛있지 않았다. 그저 살짝 특이한 소스에 버무려진 퍽퍽한 살코기들이었다. 그것을 억지로 나이프로 찢어서 씹고 있자니 이 사람들이 나한테 선호하는 스테이크 굽기 정도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래도 저녁 레스토랑 선정은 실패였나보다. Is it good? 이라는 질문에 차마 굿이라고는 대답하지 못하고 It is okay, 하고 대답해주고 나는 자리를 나섰다.
추억의 맛집들을 찾은 내 시도가 점심에 이어 연달아 실패하면서 나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이 여행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문하게 된다. 게다가 호텔에서 준 방은 내가 예약했던 방과는 다른 방이었다. 업그레이드였으면 말할 필요도 없지, 다운그레이드다. 알고보니 호텔의 잘못은 아니었고 누구나 다 아는 그런 호텔 예약 사이트의 실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악명 높은 예약 사이트는 처음엔 딸랑 21달러를 보상해주겠다고 하다가 추잡한 실랑이 끝에 내가 묵은 방과 내가 예약한 방의 가격 차이 - 약 7만원만 부쳐주고 지들 멋대로 끝을 냈다. 나의 여행 둘째 날은 이렇게 실망 속에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