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초연이 아니었다면

by 정소인

우리가 초연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아아, 나의 아비여 어미여. 지나간 옛 벗들과 상처 주었던 형제 누이여. 시간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깨닫는 마음이 먹먹하구나.

하필 당신을 처음 알 때에 세상에 갓 나온 어린아이였으며 지혜가 없이 우매한 곰과도 같아서 당신이 할퀴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상처 입으신 부모여, 할퀴움 당한 나의 벗이여, 모질게 밀어냈던 형제와 누이들이여. 이제야 나는 당신의 미움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었구나.

떠나간 님들이여, 모시어 행복을 드리고 싶건만 덧난 상처에 드릴 시간이 더 있지 못해 오히려 더욱 한이로다.

애 같은 마음 버리고서 차라리 그저 당신께 기대어 눈물 흘리었다면, 그리도 애타던 당신의 마음 달랠 수 있었을까. 어설픈 성숙을 당신께 드리었음을 부질없게도 다시금 후회만 한다.

당신께서는 어찌 나의 초연이셨는가. 초라한 삶에 내게 오신 귀한 님이셨건만. 풋내음 풍기던 익지 못한 내 면면들이 당신께 선물한 것은, 뻗어주시던 그 가지 오히려 꺾어 홀로 땅에 끄적이던 무의미한 외롬의 시간들이었다.

당신의 얼은 이제는 가리운 초연의 낯들임에도 오히려 더욱 낮에 빛남은 그 만남은 모두가 찬란한 초염(超炎*)의 해들이었음이라.

더는 나의 소식을 기다리시지 않는 코흘리개 시절의 벗들이여, 낮은 턱에 걸리어 곧 잘 울던 어린 나날 곁의 친우들이여. 그리고, 세상 더없이 운 날, 그 밤 함께 하던 또 다른 당신의 청춘들이시어.

사소하게 책잡던 어설픈 정의가 더는 이 몸에 없으니, 이제 더는 미운 것이 없다. 미운 당신이 없다.

마땅히 죽어 없어질 까닭 많은 기구한 운명, 당신의 바짓단 잡고 예까지 왔음에 그저 감사하오니. 이제사 부디 마음껏 나를 미워하시어라.

분명 서로의 초연이었기에 그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는 주어진 내에서 분명 최선이었으리라.

그렇기에 내 삶 걸어온 시간들이 분명 당신께 서린 날이었음을 받아들이노니, 나 가시는 날에는 오시어 ‘네가 참 미웠다’ 꽃 한 송이 두시며 그제사 이 죄생의 어렸음을 웃으며 용서하소서.

이 글로나마 엎디어 모질었던 본생의 미련을 깊이 뉘우치나니. 재연 없는 초연을 은사들과 같이 살아가리라.

*超 : 뛰어넘을 초 / 炎 : 불꽃 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