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건 이미 죽은 이 몸 염하는 시간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잘 빼내야 하고 잘 채워야 한다. 단순히 행위를 잘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결과적으로 잘해야 한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죽음과 닿아있다. 이를 위해선 썩을 것들, 부패할 것들을 빼내고서 향을 담아야 한다. 떠난 뒤에도 기억될 나의 향을 담아야 한다.
5평 남짓 서울의 작은방, 이곳에 누어 밤에 눈 감을 때면, 과분하게 넓은 관에 미리 들어간 듯하다. 매일의 내가 잘 죽어야 내일의 나는 또 새로이 살아갈 수 있다.
언제라도 죽음은 임할 수 있다. 죽음이 없는 듯 망각하고 살 때에 비로소 우리는 교만해질 수 있다. 잠시 있는 나의 모든 것들도 죽음이 있기에 추억이라 부르며 부지런히 기억해야 하는 일들이다.
나에게는 추억할 일들이 꽤 많으나 그 아름다운 것들이 들어갈 방이 제법 좁다. 이미 주인인 양 앉아있던 비극들을 부지런히 집에서 몰아내는 중이라 아직 빛나는 일들이 근사하게 자리 잡지 못했다.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나를 입체적으로 볼 수 없기에 나의 과거를 보지 못한다. 때로는 내 삶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삶의 무게와 지나온 길을 알 때에도 부러워하며 갖고 싶어 할까 의문이다. 결과를 원하는 것은 반드시 과정을 수반해야 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또한 마찬가지다. 나도 부러워하는 타인의 것들을 볼 때에 그 과정까지도 부러워하는가?
나는 내가 반쯤 살아있다 생각한다. 그렇기에 반쯤은 이미 죽은 것이며 나의 매일은 탄생과 장례의 병행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향이다. 죽음을 끝없이 고찰하는 것이 나의 향이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흑암이 아니다. 죽음에 대해 고찰하고 고뇌하며 기억하는 모습을 언뜻 보면 부정적이라 생각하기 쉽고 우울감과 연결되어 보일지 모르나 나는 대다수의 누구보다 긍정적이다. 꽤나 많이 행복하게 산다.
다만, 떠남을 기억할 때에 머무는 자리는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떠남을 떠올릴 때에 우리는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떠난 뒤 평생 후회의 짐 지기보다, 언제나 최선하여 그저 보고 말 삶이 아닌 두고 기억되어 언젠가 밤에도 부지런히 찾아볼 별자리가 되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죽음을 기억한다.
떠날 날은 언제나 가까웁다. 이 짧은 삶에 이미 몇 번을 그러했던가. 나는 제법 당신에게 따사로운 삶이었는가. 이미 떠나온 사람이여, 앞으로 떠나갈 얼들이여, 나는 제법 아름다웠는가.
오늘도 나는 이미 죽은 이 몸에 썩어질 것들을 빼내고서 향을 담겠다.
웃는 나의 얼굴 그 앞에 국화와 향이 놓일 때면, 제법 따사로웠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
이미 죽은 삶이었다 생각되기에 미리 내 삶 뒤에 남겨질 헌사를 스스로 적어 둔다.
젊은 날의 유언은 노년까지의 삶을 얼마나 복되게 만드는가.
나 사는 길, 나 가는 길 함께 걸어가리라.